한 해의 소출을 정산하며 휴식기로 넘어가는 가을을 지낼 때, 낙엽을 떨어뜨리는 나무들은 알록달록 다채로운 색을 입습니다. 여름 내 녹색 빛을 내던 잎 속 성분은 광합성을 돕는 ‘엽록소’라는 색소입니다. 잎이 광합성 기능을 다할 무렵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지면 엽록소가 파괴되고, 공존하고 있던 다른 색소들이 비로소 제 빛을 내는 겁니다. 은행잎이 노란색으로 변하는 까닭은 ‘카로티노이드’라는 색소가 함유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카로티노이드는 평소 엽록소가 잘 흡수하지 못하는 다른 파장의 빛을 흡수하여 만든 에너지를 엽록소에 전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단풍나무의 잎이 붉게 물드는 것은 잎 속에 포함된 ‘안토시아닌’이라는 색소 덕분입니다. 안토시아닌은 식물세포 속 ‘액포’라는 기관이 산성을 띠는 정도에 따라 빨간색
수령이 약 1100년 이상으로 추정되는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는 통일신라시대때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다 꽂아놓은 지팡이가 나무로 자란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져옵니다. 지팡이가 나무가 된다니, 무슨 요술인가 싶을 수도 있지만 은행나무의 생리적인 특성을 고려할 때, 아주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나무가 후대를 잇는 가장 중요한 매개는 씨앗이지만 씨앗이 아닌 방법으로도 번식시킬 수 있습니다(무성생식). 바로 ‘삽목, 접목, 맹아 발생’입니다. ‘꺾꽂이’라고도 부르는 삽목은 식물체의 뿌리, 잎, 줄기 등에 난 상처 부위에서 뿌리가 발생하여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 자라날 수 있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개나리, 사철나무, 벚나무, 무궁화 등은 삽목이 잘 되는 나무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햄버거를 먹지 않는 이유 저는 대형 프렌차이즈 매장에서 판매하는 햄버거를 즐겨 먹지 않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이라는 책을 읽은 것이 결정적인 계기였습니다. 저자 제레미 리프킨은 ‘소가 사람을 잡아먹는다’라는 챕터에서 다국적 패스트푸드기업이 이윤추구를 명목으로 파괴하는 것들에 대해 짧지만 강렬하게 짚어내고 있었습니다. 햄버거에 들어갈 패티(다진 고기를 뭉쳐 만드는 속)를 보다 저렴하게 생산하기 위해 아마존 강 유역의 열대우림을 목초지로 바꾸어 소를 대량으로 키운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매일 어마어마한 면적의 우거진 숲을 트랙터로 밀어버릴 뿐만 아니라 그 숲에 살던 원주민은 삶의 터전을 잃고 도시 빈민으로 흡수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알고 보니, 한 입 베어 무는 햄버거에 숲과 사람들
매월 첫째 주일에는 안산 화랑유원지에서 야외예배가 드려집니다. 4.16 참사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과 416생명안전공원부지에서 함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지난 5월 예배 설교 본문은 마가복음 4장 13절~20절이었습니다. 씨앗이 길가, 돌밭, 가시떨기, 좋은 땅 중 어디에 뿌려지느냐에 따라 씨앗의 운명, 즉 싹이 트고 자라 열매 맺을 수 있느냐가 달라진다는 이야기입니다. ‘말씀’을 씨앗으로 비유한 이 본문의 내용은 제가 5년 전부터 집중적으로 담당하였던 연구주제와도 깊이 관련되어있기에 그전보다 더 특별하게 읽혔습니다. 제가 연구하던 나무들은 주로 높은 산(고도 1,000미터 이상)에 모여 숲을 이루고 있는 구상나무, 분비나무, 가문비나무 등 상록침엽수입니다. 최근 이 나무들이 집단적으로 건강을 잃거나 죽는 일이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있는 벨베데레 상궁전(upper place) 로비에는 커다란 기둥 네 개가 높은 천장을 받치고 있습니다. 각 기둥에는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를 형상화 한 남성상이 조각되어있는데, 제 눈에 들어온 것은 헤라클레스가 발로 딛고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두 개의 기둥에는 헤라클레스 발치에 육면체의 돌이 있었고, 나머지 기둥에는 잘린 나무의 밑동이 드러나 있었습니다. 작가가 나무 밑동을 벽돌과 동급으로 여긴 것 같아 인상적이었습니다. 흥미로웠던 점은, 나무가 잘린 표면, 즉 나이테 부분을 매우 섬세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어느 한 면은 나무 가운데가 썩어서 구멍이 생긴 것을 표현했는데, 그 모양이 마치 서류를 돌돌 말아 넣은 것 같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나이테에 고스란히 많은 정보를
‘아, 봄이로구나.’ 미세먼지로 우중충한 공기를 뚫고, 싱그럽게 봄을 알리는 잎눈을 보며 그루 씨는 나무를 심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미세먼지를 일으키는 원인은 다양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 건 너무 무기력했기 때문입니다. 공기를 맑게 해주는, 나무를 심고 가꾸는 일은 그루 씨가 직접 실천해봄직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직접 나무를 심으려고 하니, 머릿속에 여러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그루 씨처럼 나무는 심고 싶지만,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이들에게 물고를 터드리기 위해 그루 씨의 질문 중 일부를 공유합니다. 한 사람이 심고 가꿀 수 있는 나무의 수는 몇 그루 안 될지라도 같은 마음을 지닌 이들의 작은 실천이 모여 숲을 이루면 결국에는 회색 생활공간을 맑고 푸른빛으로 바꾸어 갈 테니까요.
지난 1월에는 스위스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거기서 마주한 두 가지 장면을 통해 겨울에 나무를 지키는 방법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우연히 거닐게 된 스위스 수도 베른(Bern)에서 마주한 장면이었습니다. 두 사내가 국회 건물 뒤뜰에 있는 나무줄기를 무언가로 감싸는 것이었습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나무를 감싸는 재료는 속이 빈 대나무 종류를 엮은 매트 같은 것이었습니다. 눈도 녹았고 햇살도 따스해서 한파는 이미 지난듯한데 왜 나무를 감싸주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이 나무들을 왜 감싸주고 계시나요?” “햇살 때문이에요.” 작업에 열중하던 사내가 하던 일을 멈추고 친절하게 답해주었습니다. “이 무렵이 되면 낮 동안 따스한 햇살에 오래 노출되어있던 나무줄기가 상처를 입거든요.” 한 나
한때 저는 고요한 숲에서 평화를 느낀다는 이에게 냉소적이었습니다. 숲속에서 얼마나 치열한 ‘경쟁’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고 하는 말 같았기 때문입니다. 나무들은 생존과 생장에 꼭 필요한 물과 양분을 조금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치밀하게 내딛고, 빛을 더 받으려고 다른 나무에 질세라 위로 뻗어나갑니다. 그러니 숲속 나무들도 저마다 ‘적자생존’을 위한 아우성을 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2009년에 제작된 영화 에서의 한 장면은 저의 생각에 다른 창을 내어주었습니다. 치유와 회복이 필요한 등장인물을 위해 서로의 어깨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데, 그 모습이 그곳에 있는 나무들의 뿌리가 촘촘한 망을 이루어 서로 연결되어있는 것과 중첩되는 장면이었습니다. 서로 다른 개체들이 연결되어있는 그 모습은 저만
“이모, 나는 뿌리반이야.” 올해 6살인 조카가 다니는 유치원에서는 원생 나이에 따라 씨앗반, 새싹반, 뿌리반, 줄기반, 꽃잎반, 열매반에 배정한다고 합니다. 땅 속에 묻혀있어 눈에 잘 띠지 않는 ‘뿌리’를 잊지 않고 포함시켰다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뿌리는 식물체가 땅에 자리를 잡고 하늘 향해 자라날 수 있게 몸체를 지지합니다. 또한 광합성과 생명유지에 필요한 물과 양분을 토양으로부터 흡수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지요. 얼마 전, 실험연구를 하는 온실 곁에서 크게 자란 소나무를 보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소나무가 찢긴 플라스틱 화분을 입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본디 땅에 심겨졌던 것이 아니라 실험용으로 화분에 심었던 어린 소나무가 몇 해 사이 화분을 뚫고 땅속으로 뿌리를 내린 것입
‘우와~ 친구야, 모과가 나무 위에 달려있는 모습을 난 지금 처음 봐!’ 모과가 노릇노릇 익어가는 어느 가을, 저와 함께 홍릉숲을 거닐던 친구가 아이처럼 이야기합니다. 바야흐로 여물어가는 열매를 올려다보는 재미가 쏠쏠한 계절입니다. 탐스런 열매가 품고 있는 씨앗은 그 나무가 후대를 이어나가는 과정에서 몹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나무는 씨앗이 겉으로 드러나 있는지, 과육 등으로 감추어졌는지에 따라 크게 속씨식물과 겉씨식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사과나 배는 우리가 먹는 ‘과육’이 씨앗을 감싸고 있는 속씨식물이고, 은행나무는 겉씨식물입니다. 나무의 종류에 따라 생김새가 다양한 열매는 씨앗이 최대한 피해를 입지 않고 싹이 트도록 나름의 전략을 지니고 있습니다. 겉씨식물로 분류되는 은행나무의 경우, 단단한 씨앗을
“나무가 죽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아요?” 생태동아리 활동의 일환으로 저를 찾아온 어느 초등학교 학생의 질문에 뜨끔했습니다. 바로 그날 아침, 시험림 안에서 죽은 나무들을 보고 왔던 터라 제 상황을 들킨 것만 같아서입니다. “사람의 죽음은 판단하는 기준이 있잖아요. 나무는 죽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요?” 나무는 이산화탄소와 물을 흡수하고 잎에서 빛에너지를 받아 탄수화물과 산소를 만들어내고(광합성), 산소를 이용해 포도당을 분해하여 에너지를 얻는 과정(호흡)을 통해 생명을 유지합니다. 따라서 광합성을 하고 호흡해야 하는 잎이 누렇게 변하거나 일찍이 떨어져 버리지 않았는지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나무가 죽었는지를 가장 쉽게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특히 잎이 누렇게 변해버렸다는 것은 잎에서 광합성을 하는데
마을 사람 대부분이 논과 밭을 일구었던 우리 동네는 나지막한 산들이 마을을 감싸고 있어 어린 시절부터 나무와 벗하며 지내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꽃을 씹으면 꿀이 나오는 아까시나무는 작은 잎을 똑똑 따며 무언가의 가부(可否)를 점쳐보기에 요긴한 친구였습니다. 또한 마을 한가운데에서 마을과 역사를 함께한 한오백년된 느티나무 아래 평상은 어른과 아이들의 놀이터였습니다. 그런데 제 삶에 어떤 의미로 스며든 나무들 중 몇몇 나무들은 그 줄기를 볼 때마다 불쌍한 마음이 들곤 했습니다. 가령 포도나무의 수피(나무줄기의 껍질)가 세로로 쪽쪽 갈라져서 자꾸 벗겨지고, 양버즘나무나 산딸나무의 수피가 얼룩덜룩하거나, 산계곡부의 물박달나무 수피가 켜켜이 갈라진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을 볼 때 특히 그랬습니다. 이는 필시 나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