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이의 나무읽기 <3>

‘우와~ 친구야, 모과가 나무 위에 달려있는 모습을 난 지금 처음 봐!’
모과가 노릇노릇 익어가는 어느 가을, 저와 함께 홍릉숲을 거닐던 친구가 아이처럼 이야기합니다. 바야흐로 여물어가는 열매를 올려다보는 재미가 쏠쏠한 계절입니다.
탐스런 열매가 품고 있는 씨앗은 그 나무가 후대를 이어나가는 과정에서 몹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나무는 씨앗이 겉으로 드러나 있는지, 과육 등으로 감추어졌는지에 따라 크게 속씨식물과 겉씨식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사과나 배는 우리가 먹는 ‘과육’이 씨앗을 감싸고 있는 속씨식물이고, 은행나무는 겉씨식물입니다.
나무의 종류에 따라 생김새가 다양한 열매는 씨앗이 최대한 피해를 입지 않고 싹이 트도록 나름의 전략을 지니고 있습니다. 겉씨식물로 분류되는 은행나무의 경우, 단단한 씨앗을 노랗고 물렁한 껍질이 감싸고 있는데, 다육질의 은행나무 씨앗 바깥껍질은 고린내가 나는 물질(뷰티릭산, 헥사노익산 등)을 함유하고 있어 곤충이나 동물의 공격을 방어합니다.

농익은 은행 열매가 바닥에 떨어져 코끝을 자극하는 데에 이르기까지, 은행나무 꽃이 찬란하게 피었던 지난 시간이 있었습니다. 은행나무는 봄에 암꽃과 수꽃이 각기 다른 나무에서 피는데, 암그루에는 암꽃이, 수그루에는 수꽃이 피지요. 은행나무 꽃은 크기가 매우 작고 잎처럼 녹색을 띠고 있어 눈에 잘 띠지 않지만, 분명 그 때 최선을 다해 피었을 꽃이 있었습니다. 수그루로부터 꽃가루를 받은 암꽃은 모진 비바람을 견디고 햇살 아래 영글게 되고, 결국 노란 열매가 됩니다.
열매가 흔히 ‘솔방울’이라 불리는 소나무, 잣나무, 구상나무와 같이 소나무과(Pinaceae)에 속한 침엽수도 대표적인 겉씨식물에 속합니다. 우리가 ‘솔방울’이라 통칭하는 것은 씨앗이 다세대주택처럼 켜켜이 모여 있는 ‘구과’입니다.

각 수종마다 씨앗이 익어가는 시간에 차이가 있는데, 구상나무와 분비나무는 봄에 핀 꽃이 당해 가을에 바로 영그는 반면, 소나무와 잣나무는 봄에 핀 암꽃이 꽃가루를 만나 수정을 하면 그 다음해 가을이 돼야 모두 익습니다. 이렇게 준비를 마친 씨앗은 낙엽이 질 무렵 각기 다른 방식으로 퍼져나갑니다. 씨앗에 날개를 달고 있는 소나무와 구상나무, 분비나무는 바람을 타고 날아갑니다. 또한 알이 굵고 무거워 날아갈 수는 없어도 고소한 맛이 일품인 잣나무는 다람쥐나 청설모와 같은 설치류들의 식량저장고로 옮겨지는데, 잣나무 씨앗을 옮긴 친구들이 너무 바쁘거나 위치를 찾지 못해 깜박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싹이 트게 되는 것이지요.
가을비가 내리고 나니 한층 더 차가워진 공기에 움츠러들던 어깨춤을 다시 활짝 펴고 깊은 숨을 쉬어봅니다. 쓸쓸해보이던 낙엽 사이로 생명의 원기를 소중하게 품고 있는 열매가 영롱하게 반짝입니다.

박고은
서울대학교에서 산림환경학을 전공, 동대학원에서 건조지에 서식하는 비술나무의 특성에 대한 연구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국립산림과학원에서 임업연구사로서 우리나라 산림의 기후변화 적응, 높은 산의 침엽수가 후대를 잇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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