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말부터 조태례 교수가 ‘푸른들’이란 이름으로 시작한 노숙자 사역은 각 사람에게 ‘자율권’을 주어 자기 방, 자기 공간을 책임지게 했다. 그리고 각자에게 하고 싶은 일과 함께 살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하면 좋을지 물었다. 여태까지 몇 년간을 길에서 혹은 쉼터에서 그날그날 임시방편으로 살아왔던 분들에게는 온전한 자기 방이 생긴다는 것이 꿈같은 일이었다. 자기 공간이 생기니 그것이 삶에 대한 애착으로 나타나 부지런히 자기 방을 치우고, 꾸미며 행복함을 느꼈고, 삶에 의욕과 안정감도 갖게 되었다. 또한 그전에 도움을 받을 때는 새벽예배 드려야 해요, 일찍 일어나세요, 일하세요, 일하지 않으면 먹지 못해요 등과 같은 명령어를 듣고 살았는데, 지금 이곳에서는 “뭘 하고 싶나요?”, “주변에 땅이 있는데 어떤
전문가가 필요해 푸른들 가족공동체의 시작은 지난 호에 게재된 것처럼 이명진 집사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이 집사가 주도하는 사역은 쉽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조건 없이 부어주면 변할 거라고 생각해 월세 방을 얻어 노숙인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모아 같이 지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사역이 혼자의 힘으로 되지 않는다는 한계를 느끼고 전문가의 필요성을 깨닫게 된 것이 지금 푸른들 공동체의 첫걸음이 되었다. 그렇다면 노숙인, 출소자들에게 어떤 전문가가 필요할까? 오랫동안 변치 않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 해줄 수 있는 사람, 그러면서도 사람들의 문제를 알고 공감하지만 새로운 길을 인도해줄 수 있으며 교정할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노숙인들의 문제는 경제적인 부분도 있지만 그보다
노숙인과 출소자들을 위한 푸른들 가족공동체. 상처로 얼룩진 이들의 회복을 돕는 이들과 변화되는 이야기를 한병선 피디가 들려준다. 평소에 알고 지내던 미술치료를 전공하신 교수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한 피디, 의미 있는 전시회가 열리는데 촬영해 줄 수 있을까요? 노숙인이었던 분들이 함께 사는 공동체에서 나온 작품과 그들을 후원하는 분들이 함께 모여서 하는 전시회예요.” 소식을 듣고 지난해 10월 카메라를 들고 인사동으로 나갔다. ‘미술의 힘, 그 치유의 능력’이란 제목의 전시회였다. 전시된 작품들은 노숙인들이 미술치료를 받는 과정 속에서 나온 작품들로 그 그림들을 자세히 보니 그분들 마음이 회복되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변화가 드러나는 미술 표현 처음 그림들은 형태도 없고, 힘도 없고, 색도 희미한 그림들
하와이 이민자 강한준 씨는 고향인 제주도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어려운 가운데서 헌금을 보냈고, 그것으로 인해 법환교회가 세워졌다. 그 과정 속에 드러난 이야기들을 한병선 피디가 들려준다. 강한준 권사의 사연을 따라가면서 그 당시 하와이 이민에 대해 다양한 자료들을 접하게 되었다. 당시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한 노무자들의 사진을 보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중무장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양쪽 다리엔 각반을 차고 장갑을 이중으로 끼고 겹겹의 옷을 입었는데, 옷 입는 데만 30분이 걸린다는 이 복장은 사탕수수밭에서 나오는 전갈과 독충들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 복장으로 38도가 넘는 뜨거운 열대 날씨 속에서 하루 10시간씩 농장 일을 한다는 것은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행위였다. 한국인들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하와이 이민자 강한준 씨는 고향인 제주도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어려운 가운데서 헌금을 보냈고, 그것으로 인해 법환교회가 세워졌다. 그 과정 속에 드러난 이야기들을 한병선 피디가 들려준다. 미국 하와이 마우이 섬에서 강한준 권사는 1917년부터 몇 년간 지속적으로 법환교회를 위해 헌금을 보내왔지만 시간이 흐른 후 연락이 끊어진 상태였고, 그에 대한 소식은 알 수가 없었다. 한때는 제주에 있는 친척들이 강 권사의 소식을 알기 위해 하와이까지 찾아갔지만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최근 법환교회 100년 자료를 만들면서 강한준 권사에 대한 행적 찾기가 다시 시작되었고, 이덕희 하와이 한인 이민 연구소 소장으로부터 자료가 오기 시작했다. 강한준 권사의 하와이 생활 자료에 의하면 그는 1903년 10월 5일 시베리아호를
하와이 이민자 강한준 씨는 고향인 제주도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어려운 가운데서도 헌금을 보냈고, 그로 인해 법환교회가 세워졌다. 그 과정 속 이야기들을 한병선 피디가 들려준다. 1902년 시작된 하와이 이민은 순탄치 않았다. 아무리 살기 힘들어도 조국을 떠난다는 공포심과 부모와 가족 친지들과 함께 살아가는 자신들의 삶의 형태를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했으며, 무엇보다 조상의 묘를 버리고 이국땅으로 간다는 것이 마땅치 않다는 생각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하와이 이민 모집이 부진해졌을 때 적극적으로 이민자 모집을 독려한 사람은 인천에서 감리교단 소속으로 활동을 한 존슨 목사였다. 그는 웅변가이자 설득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교인들에게 하와이를 살기 좋은 기후와 자연환경이 있는 곳으로 소개했다. 또한
1903년 하와이 이민이 시작되었을 때 하와이로 떠난 사람이 고국의 선교부에 돈을 보내 목사 파송을 부탁하고 예배당 짓는 일에 헌금한 일은 한국교회 역사에 드문 일이다. 이민생활의 어려움 속에서도 복음이 들어가지 못한 제주도 포구의 한 어촌마을을 기억하고 오랜 기간 헌금하여 교회를 세웠고, 그 교회가 지금 100년을 맞이하며 그 뿌리를 찾아 하와이 마우이섬에 살았던 최초 헌금자인 강한준 씨를 찾았다. 그 과정 속에서 나타난 드라마틱한 내용을 한병선 피디가 취재하고 우리에게 들려준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100년 전인 1917년 6월, 전남노회 전도국에 하와이 마우이섬으로부터 편지 한 통이 도착한다. “앞으로 제가 5년간 매년 미화 60원전씩 보낼 테니 제가 살았던 법환리에 전도인을 보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