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저고리, 검정치마에 고아 아이를 업고 있는 서서평의 사진. 이 사진 한 장은 서서평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서서평은 미혼모의 딸이었다고 한다. 그녀의 어머니는 서서평이 세 살 때 독일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재혼을 하였다. 서서평이 18세 때 어머니를 찾아 미국으로 갔으나 어머니는 그녀를 반기지 않았다. 가톨릭 신자였던 그녀의 어머니는 서평이 간호대학을 다니면서 그리스도를 영접한 일로 딸을 더 멀리하였다. 그러다 서평은 조선에 여자 간호사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소식이 마음을 움직였고, 곧 서평은 조선에 선교사로 지원하게 되었다. 서평은 사역 도중 안식년을 맞이하여 미국에 계신 그리운 어머니를 방문했다. 그런데 문을 열고 서서평을 본 어머니는 딸의 차림새에 실망하였다. 조선에
성내교회의 전시실에 있는 한 사진에 시선이 머물렀다. ‘제주 부인조력회’라는 제목 속에 미소 짓고 있는 한 서양인 여자 선교사의 모습 때문이었다. 그 여인의 이름은 전남 광주를 중심으로 선교하였던 서서평 선교사, 미국식 이름은 엘리자베스 요한나 쉐핑(Elizabeth Johanna Shepping, 1880-1934년)이다. 서서평 선교사는 주기적으로 제주로 갔다. 그의 마지막 방문은 1933년 8월 제주 모슬포에서의 성경공부 모임이었다. 서로득 선교사가 건강악화의 이유로 극구 말렸지만 “건강이 회복된 다음에 하자면 하나님 사업은 미루어지지 않는가? 또, 그들과 약속한 일이니 가야 한다. 목숨이 붙어 있는 이상 가지 않을 수 없다”며 그녀는 강행하였다. 당시 이틀반이나 걸리는 뱃길도 마다하지 않았다. 1등석
한국에 왔던 초기 선교사님들은 ‘확장 주일학교’(Extension Sunday School)를 하였다. 확장 주일학교는 성장한 교회들이 주변 20리, 30리 안에 있는 마을로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고 주일성경학교를 하는 것으로, 주일이 되면 교인 40여 명을 데리고 아침 일찍 교회를 나서 5명씩 8개 마을에 들어간다. 그 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장년, 어린이 주일학교를 했는데, 요즘 말하는 ‘아웃리치’가 그것이다. 32세의 처녀 간호사로 광주에 온 고아와 나환자들의 어머니, 교육자로서 생을 마감한 서서평(Elisabeth J. Shepping·1880~1934) 선교사는 말을 타고 20리 밖의 마을에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고 믿는 사람이 생기면 확장 주일학교를 했는데, 미국 교회가 트럭을 후원해주어 주일마다 트
제주에서 만난 포사이드 선교사 제주도는 슬픈 역사를 간직한 섬이다. 제주도는 고려시대, 삼별초가 진압된 후 몽골의 지배를 100년 동안 받았다. 그 후 목마장이 설치되어 말(馬)로 유명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인조7년부터 순조25년까지, 약 200년간 제주 사람은 육지로 나갈 수 없도록 법으로 정했다. 굶주림으로 주민들이 육지로 나가면 말과 귤을 키울 사람이 감소할 것을 염려해 금족령을 내렸던 것이다. 조선의 양반들은 귀양을 가든 임지로 발령을 받던지 제주도로 가는 것 자체를 죽음으로 여겼다. 이재수의 난, 4.3 사건에 이르기까지 제주의 역사 전체는 슬픈 역사였다. 이러한 제주에 100년 전, 파란 눈의 의료 선교사가 왔다. 포사이드 선교사(William H.Forsythe 1873-1918)였다. 19
이 시리즈는 한국에 와서 섬으로 들어가 복음을 전한 초기선교사들의 행적을 담고 있다. 이기풍 목사는 1907년 한국 초대 장로교 목사 7인 중 한 명이었다. 그 목사들을 중심으로 독노회가 설립되었고, 노회장이었던 마포삼열 목사(Samuel A. Moffett)는 첫 사역으로 제주도 선교사 파송을 결정했다. “누가 가겠소?”라는 마포삼열 목사의 질문에 길선주 목사가 이기풍 목사에게 “자네가 마포삼열 목사의 턱을 깨었으니, 그 빚을 갚기 위해 제주도로 가게”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예수를 믿기 전 이기풍 목사는 1891년부터 1893년까지 평양에서 포졸을 했었다. 그때 당시 마포삼열 목사를 핍박하며 돌을 던졌고, 그 돌이 턱에 상처를 입힌 것이라고. 하지만 실은 마포삼열 목사의 턱은 어릴 때 다친
오웬·윌슨·포사잇 선교사·여수 애양원 1909년 4월 오웬 선교사가 장흥에서 선교 중 급성 폐렴으로 광주로 옮겨지자 동역자 윌슨 선교사(Robert M. Wilson)는 목포에 있는 포사잇(William H.Forsythe) 의료 선교사에게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포사잇 선교사는 나주까지 배를 타고 와서 다시 말을 타고 광주로 향했는데, 광주로 가는 길에 한 여인이 길가에 엎드려져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말에서 내려 그 여인을 안아보니 한센인(나병환자)이었다. 숨이 붙어있는 것을 보고 그는 여인을 말에 태우고 자신은 걸어서 광주까지 갔고, 그 사이 오웬 선교사는 사망한다. 광주제중원에 그 여인을 눕혀 치료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병상이 없었다. 그러자 오웬의 부인은 남편을 잃은 슬픔을 뒤로 한 채 오웬의 침
완도 조약도에 있는 약산제일교회로 배를 타고 들어갔다. 조약도의 옛 이름은 약산도. 조약도의 산에 나오는 129종의 풀들은 약초가 된다 하여 약산도(藥山島)라 불렀다. 그리고 그 풀을 먹고 자란 흑염소가 보약이 된다고 하여 약산 흑염소는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약산제일교회는 1904년 오웬 선교사의 전도인 노학구에 의해 복음이 시작되었고, 1905년 오웬이 들어가 복음을 전파하므로 정식교회가 세워졌다. 당시 당회기록에 다음과 같이 남아 있다. “1904년 10월 16일 본도인 정만일씨가 전도인 노학구씨를 청하여 처음으로 예수의 십자가를 전파하다. 1905년 6월 8일 미국선교사 오목사(오웬)가 예수의 복음을 전하므로 믿기로 작정한 사람 사오명이 있어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지라.” 지금은 약산제일교회 옛 예배당
전킨이 죽고 난 후 호남 남장로교회 선교사들 중에는 그의 시체를 교인들에게 보여주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갖는 이들이 있었다. 죽은 자를 추앙하는 조선인들에게 전킨이 우상화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때 한 선교사가 말했다. “전킨 목사는 살아 있는 동안 한국인 만나는 것을 지겨워하지 않았으며, 바빠서 안 만나 준 적이 거의 없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와 만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 웬 말인가?” 마침내 전킨의 얼굴을 보는 것이 조선인들에게 허락이 되었다. 전킨을 통해 복음을 전해 들었던 수많은 조선인들이 그를 보기 위해 왔다. 당시 조선선교사로 들어온 니스벳의 기록에 그 이야기가 실려 있다. “나는 슬픔에 젖어 전 목사를 바라보고 있는 한국인들을 쳐다보면서 몇 주 전 전킨 목사가 나에게 보낸 편지가
‘땅 끝에 와 섬으로 가다’ 연재를 시작하는 박원희 목사(낙도선교회 대표)를 만났다. 너나 할 것 없이 도시로, 더 큰 도시로 향해 나아가고, 어쩌면 복음의 방향도 그렇게 나아갈 때 누구 하나 주목하지 않는 변방 땅 끝 섬으로 간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왜 주목하게 되었는지를 들어보았다. 한양대 재학 시절 CCC(한국대학생선교회)를 통해 예수님을 만난 후 그의 삶은 바뀌었다. 총신대 신학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안산동산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사역하던 시절, 친구 홍석기 목사(목포상림교회)가 찾아온다. 브라질 선교사로 떠나며 낙도선교회를 맡아달라는 청을 했다. 허투루 넘겨지지 않아 기도에 돌입하고 6개월, 그는 수락한다. 그리고 15년이 흘렀다. 하지만 여전히 낙도목회자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어느 한 사람 호의호식
이 시리즈는 한국 초기선교사들 중 섬으로 들어가 복음을 전한 초기선교사들의 섬선교와 그들의 행적에 얽힌 선교이야기이다. “6마일 이상을 넘어가지 마시오! 전킨 선교사!” 복음을 전하다 과로로 병에 걸린 전킨 선교사에게 내린 명령이었다. 미국 남장로회 호남선교부는 윌리엄 전킨 선교사(Junkin, William McCleary, 1865~1908)에게 미국으로 건너와 요양할 것을 권했지만 미국으로 가면 더 이상, 조선으로 올 수 없다는 것을 안 그는 사양했다. 군산 구암에 선교부를 설치하고 금강, 동진강, 만경강 일대를 복음선을 타고, 말을 타며 복음을 전한 전킨 선교사가 그 명령을 지킬 리 만무했다. 오히려 전주 일대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고, 전주서문교회를 서문 밖으로 이전 건축하였다. 그때 당시 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