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웬 선교사 (1)

완도 조약도에 있는 약산제일교회로 배를 타고 들어갔다. 조약도의 옛 이름은 약산도. 조약도의 산에 나오는 129종의 풀들은 약초가 된다 하여 약산도(藥山島)라 불렀다. 그리고 그 풀을 먹고 자란 흑염소가 보약이 된다고 하여 약산 흑염소는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약산제일교회는 1904년 오웬 선교사의 전도인 노학구에 의해 복음이 시작되었고, 1905년 오웬이 들어가 복음을 전파하므로 정식교회가 세워졌다. 당시 당회기록에 다음과 같이 남아 있다.
“1904년 10월 16일 본도인 정만일씨가 전도인 노학구씨를 청하여 처음으로 예수의 십자가를 전파하다. 1905년 6월 8일 미국선교사 오목사(오웬)가 예수의 복음을 전하므로 믿기로 작정한 사람 사오명이 있어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지라.”

지금은 약산제일교회 옛 예배당 모습은 없고 새로 세워진 예배당건물과 100주년 기념비(사진 우)가 남아 있다. 약산제일교회 담임인 박형서 목사가 나에게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110년 전에 미국선교사들이 이곳까지 와 복음을 전하고 섬교회 담임을 했다는 것이 이해가 됩니까? 사람들이 믿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가끔 칠십, 팔십 대의 어른들이 예수 믿겠다고 옵니다. 그들이 자기가 60년, 70년 전에 주일학교를 다녔다는 고백을 합니다. 선교사들이 뿌린 복음이 지속되어 흐른다는 것을 그 노인들이 다시 교회 등록할 때 마다 확인하게 됩니다.”
약산제일교회 100주년 기념비에는 낯익은 선교사들의 한국식 이름이 있다. 류서백, 맹현리, 조하파 등. 돌아오는 길에 동행한 이상현 목사(완도한빛교회)가 나에게 물었다.
“정말 여기까지 선교사님이 왔단 말입니까?”
오웬은 조약도에서 복음을 전한 후 배를 타고 완도 포구 입구의 신학리로 와 완도 신학교회(1906년)를 설립했다. 신학교회 입구에는 작은 전시함이 있는데, 그 전시함에는 ‘생명록’이라 하여 당시 교인들의 교적부가 전시되어 있다. 오웬이 뿌린 복음이 작은 섬교회 생명책 명부 안에 생명의 이름으로 적혀 있다.

“나를 오목사로 부르시오”
오웬 선교사(Clement Carrington Owen, 1867-1909)는 1897년에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어 1898년 11월 5일에 입국했다. 목포에서 선교를 하다 병이 심해져 미국으로 갔다가 1904년 다시 조선으로 들어와 광주에서 선교를 하였다.
그의 선교 지역은 화순, 보성, 장흥, 순천 등 13개 군이었다. 오웬은 순회 선교를 나가면 한 달씩이나 걸렸다. 때로는 200명 넘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430명에게 학습(교리교육)을 실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1909년 3월~4월 초 광주 남쪽 280리 장흥 지역에서 순회전도를 하던 중 급성폐렴에 걸리게 되었다. 급히 광주로 옮겼으나 결국 순교하였다. 그때 나이 마흔 둘. 그의 아내 복중에는 한 달 뒤에 태어날 아이가 있었다.
오웬 선교사의 무덤을 광주 양림동 호남신학교 외국인 선교사 묘지에서 만났다. 묘비에는 한문으로 ‘오목사’라고 되어 있었다. 오웬의 한국식 이름은 오기원(혹은 오원)이다. 양반에게 이름이 있고 평민, 천민들에게는 이름이 없는 것을 안 오웬은 평민들과 친구가 되고자 자신의 이름과 ‘님’이라는 존칭을 지우고 그냥 ‘오목사’로 부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죽어서도 ‘오목사’로 불렸다.
조선의 백성들과 함께 아파하고 고통하면서 그들의 친구가 되고자 했던 오목사. 그 마음이 그를 조선의 땅 끝, 섬으로, 오지로 가게 하였다.
수백리 길을 말을 타고, 걷고, 배를 타며 완도, 고흥, 장흥, 보성으로 갔던 것이다.

박원희
낙도선교회 대표로서 우리나라의 440여 섬과 14만 곳의 오지를 복음화하기 위해 38명의 섬, 오지 목회자와 동역하며 한국의 신학생들을 단기선교사로 파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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