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에 걸렸습니다. 하루 이틀 사흘, 밥 먹고 약 먹고 잠만 자는데도 낫지 않았습니다. 엄마가 콜록거리니 민서도 콜록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민서는 건강한 편이라 약국에서 파는 종합감기약 몇 알만 먹으면 감기가 쉽게 떨어집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독한 감기를 옮긴 사람이 엄마인 저이다보니 더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민서야, 갈비탕 먹을까?” 입도 깔깔해 따뜻한 국물이 먹고 싶었고 기운이라도 차리려면 잘 먹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갈비탕을 앞에 두고 민서와 마주 앉았습니다. 나도 민서도 할 말이 별로 없었습니다. 식당 종업원들이 힐끗힐끗 우리 두 사람을 쳐다보았지만 크게 마음 쓰지 않았습니다. 항상 가족과 섞여 있는 민서, 엄마보다는 아빠와 더 가까운 민서입니다. 이렇게 단둘이 마주 보고 앉은 적이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시골에서 김포로 온 지 3년. 늘 낯설다고 느꼈던 곳인데 막상 떠난다고 생각하니 모든 것이 새삼스레 다가왔습니다. 민서가 매일 아침 오가던 등굣길, 이제 막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회화나무와 단풍나무가 새로워 보이고, 농수로를 따라 길게 나 있는 산책길과 오가는 이웃들도 더 정다워 보였습니다. 선생님의 오른팔 전학을 갈 것이라고 여름방학 전에 미리 알려 드렸더니, 민서를 맡고 있는 특수학급 선생님의 서운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매일 민서와 이별 연습을 하고 있어요. 민서가 제 오른팔 역할을 해줬는데 너무 서운하네요.” 선생님은 남은 날 동안 민서와 추억을 더 쌓으려는 듯, 2학기 개학하고 나서 민서를 더 살뜰하게 보살펴 주었습니다. 이사하기 며칠 전, 민서는 선물을 잔뜩
삽질 좀 해줄래? 여름 햇살의 따가움도 어느새 한풀 꺾이고, 풀벌레들이 또르르 또르르 노래를 부른다. 사람보다 먼저 가을을 알아차리고 노래를 부르는 풀벌레들이 참 대견하다. 주말 농장 텃밭에 들렀다. 올봄에 지인의 선심으로 일구게 된 텃밭인데, 여름내 크고 작은 즐거움을 주었다. 가지와 오이, 고추는 금방 따내어도 거짓말처럼 자꾸자꾸 열렸고, 민서 주먹보다 큰 참외를 따서 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따온 것을 이웃에 나눠주니 그 기쁨도 컸다. 이 특별한 즐거움은 이른 봄날 민서 민해의 아름다운 수고가 없었다면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들과 만든 텃밭 “얘들아, 텃밭 만들러 갈래? 오랜만에 삽질 좀 해줄래?” 남편은 주말에도 출근을 하기에 함께 할 수 없어 아쉬웠지만, 힘센 두 아들의 도움을 받아 멋지게 텃밭을
몇몇 학교를 찾아가 학생들에게 원예치료를 해 주고 있습니다. 자그마한 식물 모종을 들고 가서 학생들과 함께 예쁜 화분에 옮겨 심으며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들여다봅니다. 내가 만나는 학생들은 장애를 가졌거나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들입니다. 두 쪽 다 마음을 표현하는 기술이 세련되지 못하여서 조금은 어눌한, 조금은 서툰 소통을 하는 아이들입니다. 그런데 원예치료사로서 아이들 앞에 서 있으면서 매번 느끼는 바이지만, 누가 장애이고 누가 장애가 아니며, 누가 부적응 상태이고 누가 적응 상태인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부족함과 연약함을 가지고 있는데, 그 부족함의 무게를 누가 어떻게 재어서 장애 비장애를 나누고 적응 부적응을 나누었는지 모호해집니다. 어느 모로 보면 아이들보다 원예치
선생님의 따뜻한 손길 민서가 학교 갈 채비를 합니다. 교복을 입고 가방을 메고 실내화 주머니를 듭니다. “엄마, 포도주스 하나 더 줘야지.” 민서는 일주일에 두 번 사설기관에서 언어치료를 받습니다. 오후 늦은 시간에 치료가 이루어지니 출출할 것을 대비해 등교할 때 미리 간식을 챙겨 갑니다. 그런데 오늘은 하나를 더 넣으라고 말합니다. 민서의 등교와 하교, 그리고 이동을 책임져 주는 활동 보조 선생님을 위한 배려입니다. 애초에 활동 보조 선생님이 마다하여서 선생님의 간식은 함께 넣지 않는데, 오늘 따라 민서가 따로 챙기는 것입니다. 그만한 까닭이 있습니다. 지난주에 활동 보조 선생님이 민서를 유난히 잘 보살펴 주었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민서는 감기를 앓았습니다. 열도 많이 나고 기침도 심했습니다. 새 학년이
지난 늦가을, 일부러 김포 전통시장을 돌며 늙은 호박을 눈에 띄는 대로 사 두었습니다. 우리 식구가 호박죽을 좋아하기도 하거니와 손님치레하기도 좋아서 미리 마련해 둔 것입니다. 겨우내 생각날 때마다 하나씩 꺼내어 알뜰하게 죽을 끓였습니다. 오늘 저녁에도 찹쌀을 갈아 넣고 재주껏 호박죽을 끓였습니다. 마지막 남은 호박이라 아쉬워서 그랬는지, 다른 때보다 달기가 그만이었습니다. 박 집사님의 호박 호박죽을 끓이며 시골 생각을 했습니다. 몇 해 전, 박 집사님이 주신 커다란 호박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말이 ‘커다란’이지 흔히 보는 맷돌 호박의 두 배는 되고도 남았습니다. 익기는 또 어찌나 잘 익었던지 색깔은 누렇다 못해 불그스름하였습니다. 껍질을 벗기는 동안 손목이 뻐근해질 정도였습니다. 우리 집에서 제일 큰 솥
오후 세 시, 겨울 햇살이 길게 거실로 들어옵니다. 눈부십니다. 무료해 하던 민서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손그림자 놀이를 시작합니다. 갈매기, 강아지, 달팽이…. 둘이서 즐겁게 만들어 봅니다. 민서의 손을 오랜만에 찬찬히 들여다봅니다. 다운증후군 아이들의 손은 짤막하고 뭉툭하고 오동통합니다. 민서는 그 작은 손을 부지런히 움직여 주위 사람들에게 웃음을 전해줍니다. 초등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 또래보다 젓가락질을 잘 해서 담임선생님의 전화를 따로 받았습니다. “깻잎 장아찌 한 장을 집어서 밥 위에 얹더니 보란 듯이 싸 먹었어요. 급식실 선생님들이 민서만 쳐다보았어요.” 말솜씨가 부족해 의사소통은 쉽지 않았지만, 젓가락질 하나로 민서가 또래보다 훨씬 더 잘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선생님께 보여준 것입니다.
두 글자 편지 민서는 요즘 한글을 익히고 있습니다. 새우, 수염, 감자, 치즈, 안경, 비행기…. 그림을 보며 한 글자 한 글자 쓰거나 읽고 있습니다. 민서가 한글을 익히기 시작한 지는 꽤 오래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시작했으니 햇수로 따지면 5년이 넘습니다. 긴 시간이 흘렀지만 민서에게 여전히 한글 익히기는 어려운 모양입니다. 한글을 익히는 속도가 많이 느리긴 하지만 엄마로서 초조한 마음은 들지 않습니다. 말도 그렇게 천천히 익혔기 때문입니다. 민서에게는 민서의 속도가 있을 것이기에 느긋한 마음으로 함께 글자를 쓰고 읽고 있습니다. 민서가 제일 먼저 익힌 글자는 ‘엄마’와 ‘아빠’였습니다. 처음 발음한 말도 ‘엄마’와 ‘아빠’였듯이…. 언젠가 민서가 접착 메모지를 건네 준 적이 있습니다. 조금
“엄마, 약 먹고 공부해야 돼.” 매일 아침, 초록색 가방을 메고 현관을 나설 때마다 민서는 엄마를 위한 인사를 꼭 남깁니다. 오늘은 감기약 챙겨 먹을 것을 당부하고 갔습니다. 며칠 감기를 앓고 있어 콜록거리는 엄마가 저 보기에도 안쓰러운가 봅니다. 공부를 하라고 한 것은 컴퓨터 작업을 두고 한 말입니다. 글 쓰느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민서는 공부하는 것으로 압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컴퓨터로 세상 구경을 하고 몰랐던 것을 배우고 있으니…. 예고 없이 찾아온 아이, 민서 민서는 저의 아들입니다. 올해 열다섯 살, 중학교 1학년입니다. 남다른 게 있다면 23번 염색체를 하나 더 갖고 태어난 다운증후군 아이입니다. 주민등록 서류에 지적장애 1급이라는 특별한 기록을 하나 더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