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에서 나더러 무늬만 엄마라고 했다. 그리고 ‘방목’이라 했다. 맞다. 난 아이들을 늘 풀어 놓았으니까. 단, 밥해주는 일만은 최선을 다했다. ‘공부는 학교에서! 예절은 집에서!’ 그것이 내 나름의 교육철학이었다. 난 아이들 학교에 찾아간 일이 없다. 비 오는 날 우산 주러 간 적은 있지만 필요 이상의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아이들은 그로 인해 책임감을 배우고 자기의 일을 스스로 하는 자립심을 키웠으리라. 우리 네 식구는 십여 년을 방 한 칸에서 생활해 왔다. 몽골선교의 비전이 있어 떠날 때 가볍게 가려고 집 없이, 짐 없이 사는 훈련을 해 온 것이다. 명색이 작가라고 하나 뿐인 책상은 늘 내 차지였고, 아이들은 엄마 뒤에 앉아 밥상 펴고 숙제하며 공부했다. 집에 손님이라도 오시는 날이면 밥상을 들고 주
학교에서 근무할 때 학생들에게 강조한 것이 ‘감사일기’였다. 매일 일기를 쓰되 주제 하에 감사한 내용을 써보자고 과제를 내주었다. 언젠가는 ‘엄마’하면 떠오르는 5감사를 적어보자고 했는데, 14세 아이들이 써 내려간 엄마에 대한 감사를 읽으며 울었던 기억이 난다. 늘 내 입장에서, 엄마의 입장에서만 아이들을 바라보았는데, 아이들의 마음을 읽고 나니 그 마음을 어떻게 보듬어야 할지,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됐다고나 할까. 아이들의 주옥같은 글 일부분을 옮겨본다. 1. 엄마는 절대로 아프면 안 되고, 하루라도 쉬면 안 되고 늘 가족을 돕는 사람이다. 난 그런 엄마를 보며 ‘엄마는 참 힘든 거구나’ 생각했다. 엄마라는 단어가 내 머릿속을 꽉 차게 만든다. 엄마가 나에게 주는 사랑은 무료인데 왜
저는 아이들이 갖고 싶어 하는 것을 즉석에서 사준 적이 없는 엄마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기다림’에 대해 배우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고맙게도 아이들은 갖고 싶은 게 있어도 길에서 떼를 쓰거나 우는 일이 없었습니다. “아이고, 우리 애는 아무도 못 말려요”라는 분이 계시다면 그분은 이미 자녀에게 기선제압 당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아이들은 눈치가 백단이거든요. 떼를 쓰면 엄마가 넘어올지 안 넘어올지를 기가 막히게 파악합니다. 아무도 못 말릴 아이는 없습니다. 마음 약한 엄마가 있을 뿐. 어쨌든 저희 아이들은 친구들이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있을 때 절제와 인내를 온몸으로 익히며 오랜 시간을 기다려 주었습니다. 스무 살이 넘어서야 간신히 중고휴대폰을 샀거든요. 사실 저희도 중간에 갈등하는 시간은 있었답니다. 그러
아침마다 등교하는 아이들 가방에 넣어주던 엄마의 편지. 매일 당부하던 글은 표현만 달랐을 뿐 비슷한 내용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어찌 보면 잔소리 같은 이야기지만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며 꼭 지켜줬으면 하는 중요한 삶의 가치였다고나 할까요? 그 이야기를 열 가지로 요약해서 냉장고에 붙여두었는데 오늘은 그 내용을 소개할까 합니다. 1.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고백하며 일어나자. 2. 가장 첫 시간은 하나님께! 그 시간을 놓치면 따로 기도하기가 쉽지 않거든. 스마트폰을 보기 전에 먼저 성경을 읽고 기도하자. 말씀과 기도는 습관이란다. 3. 사람을 사랑하고 존중하되 사람이 하는 말은 잘 분별하자. 열 사람이 모이면 열 가지 자기소견에 옳은 말이 나오지만 말
어느덧 아이들이 자라 올해로 아들은 스물 셋, 딸은 스무 살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키웠는지 지난시간을 생각해보면 가물가물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어려서부터 아이들에게 써준 ‘엄마의 편지’를 열어보면 지나간 어제의 시간들이 모두 살아서 오늘이 됩니다. ‘엄마의 편지’는 첫 아이 이삭이가 걸음마를 배우며 옹알이를 시작할 무렵부터 썼던 것 같습니다. 작은 수첩을 마련해 매일 한두 줄이라도 꼭 편지를 썼는데, 기저귀를 갈아줄 때면 “엄마 마음속 찌꺼기도 너처럼 밖으로 버리고 싶다”고 적었고, 봄이면 파릇파릇 움트는 새순 이야기도 적고, 여름이면 냉수 같은 시원한 사람이 되자고, 가을이면 높은 하늘처럼 꿈을 크게 갖자고, 겨울이면 군고구마처럼 따뜻한 사람이 되자고 편지를 썼습니다. 발음이 서툰 아이의 말을 소리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