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법환교회 이야기 ③

하와이 이민자 강한준 씨는 고향인 제주도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어려운 가운데서 헌금을 보냈고, 그것으로 인해 법환교회가 세워졌다. 그 과정 속에 드러난 이야기들을 한병선 피디가 들려준다.

미국 하와이 마우이 섬에서 강한준 권사는 1917년부터 몇 년간 지속적으로 법환교회를 위해 헌금을 보내왔지만 시간이 흐른 후 연락이 끊어진 상태였고, 그에 대한 소식은 알 수가 없었다.
한때는 제주에 있는 친척들이 강 권사의 소식을 알기 위해 하와이까지 찾아갔지만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최근 법환교회 100년 자료를 만들면서 강한준 권사에 대한 행적 찾기가 다시 시작되었고, 이덕희 하와이 한인 이민 연구소 소장으로부터 자료가 오기 시작했다.

강한준 권사의 하와이 생활
자료에 의하면 그는 1903년 10월 5일 시베리아호를 타고 호놀룰루 항에 도착했다는 것과 결혼 후 하와이로 왔던 것, 마지막 거주지가 제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그 후 마우이섬 파이아 사탕수수 공장에서 일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 당시 사탕수수밭에서 노동자로 일한 것보다 사탕수수 공장에서 일한 한 달 월급이 조금 더 높았다고 알려진다.
부인인 최혜경 씨는 1911년 마우이섬으로 들어왔다. 1890년생인 최 씨는 인천에서 선교사들이 가르치는 고등학교를 다녔고, 하와이에서 생활하면서 남편의 성을 따라 ‘강 프르텐스’라고 불렸으며, 마우이섬 파이아-스프레스빌 감리교회를 다녔다. 부부는 슬하에 5남 2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1927년 7월 13일 강한준 권사가 사망함에 따라 막내딸인 강 프란시스는 유복녀로 태어나게 되었다.
강한준 권사는 처음 마우이에 와서 교회를 다니며 교회활동에 헌신적으로 임한 것으로 보여진다. 파이어-스프렉스빌 교회 계삭록(회의록)에 보면 강한준이란 이름이 나오는데 탁사(교회를 돌보는 사찰의 옛 명칭)로 봉사하며 권사가 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아내 최혜경 씨도 교회학교 교사로 이름이 올려져 있었고, 곳곳에서 부부가 교회에 헌신했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법환리에 교회를 세워야 겠다
강한준 권사는 자기가 떠나온 고향인 제주 법환리에 교회가 없음을 마음 아프게 생각했고, 그들을 위해 말씀 전해줄 사람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1917년부터 꾸준히 4년간 전라도 노회에 법환리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매년 미화 60불씩을 헌금했다. 그 헌금으로 전라도 노회는 법환리를 특수사역지역으로 정하고 윤식명 목사를 파송하게 된다. 그뿐 아니라 1918년에는 예배당 구입비로 200원을 보내 와 대지 100평에 초가 2채를 사서 본격적인 교회모습을 갖출 수 있게 해주었다. 강 권사가 1917년 헌금을 시작했을 때는 벌써 세 아이가 있었다. 그래서 그 당시의 상황을 알기 위해 이덕희 소장과 인터뷰를 하였다.
“1903년 당시 사탕수수 농장에 들어가면 평균 한 달에 1주일에 6일을 일하고 평균 15~16불을 받습니다. 강한준 씨는 사탕수수 공장에서 일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22불 내지 25불을 받았다면 2/3 정도가 생활비로 들어갔다고 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 달에 5불을 저축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웠을 거예요. 그분이 1년에 60불씩 4~5년을 냈다는 것은 소위 말해서 약정을 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한 것입니다.”
이덕희 소장은 이런 사례는 여태까지 교회사에 없었던 일이었다고 말하였다. 교단에서 선교사를 파송해서 선교를 하거나 선교사역을 후원하는 일은 있지만 평신도가 이렇게 자신이 살던 곳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지속적으로 헌금하고 교회를 세우는 것이 극히 드문 일이라면서 놀라움을 표시했다. 강한준 권사가 조국에 있는 일가친척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해 얼마나 마음과 물질을 쓴 것이었는지, 많은 희생을 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그동안 아내 최혜경 씨가 계속해서 남편을 지지해 주지 않았다면 제주 법환리에 그렇게 헌금을 할 수 없었을 것이고, 법환리에 교회가 생길 수도 없었을 것이다.

하와이에서 만난 손녀들
강한준 권사에 대한 자료를 더 찾고 그의 후손을 만나기 위해 하와이에 갔을 때, 강 권사 손녀인 강 실비아 도나와 그녀의 여동생 마르시아를 만날 수 있었다. 77세의 큰손녀 실비아와 72세인 마르시아와 마르시아의 2명의 딸도 함께 나와 우리를 반겨 주었다.
가장 먼저 궁금했던 것부터 물었다. 1927년 할아버지 강한준 권사가 51세란 젊은 나이에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실비아는 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돌아가시던 날 강한준 권사는 일을 마치기 전에 낮에 몸이 아프다고 집에 돌아왔고, 그날 밤 고열로 아파 의사를 찾아 나섰지만 복막염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아마 맹장이 터졌는데 제때 치료를 하지 않아 복막염으로 번지면서 손을 쓰지 못한 것 같다.
또한 할머니 최혜경씨와의 추억도 얘기해주었는데, 그들의 삶을 인간적으로 더 알고 싶어졌다.

한병선
영상프로덕션 ‘한병선의영상만들기’를 설립하여 기독교 단체들의 홍보영상을 만들고 있으며, 기획 다큐멘터리와 영상 자서전 제작에 힘쓰고 있다. 저서로는 1950년대 한국에 왔던 선교사들의 이야기 <이름 없는 선교사들의 마을, 블랙마운틴을 찾아서>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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