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죽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아요?”
생태동아리 활동의 일환으로 저를 찾아온 어느 초등학교 학생의 질문에 뜨끔했습니다. 바로 그날 아침, 시험림 안에서 죽은 나무들을 보고 왔던 터라 제 상황을 들킨 것만 같아서입니다.
“사람의 죽음은 판단하는 기준이 있잖아요. 나무는 죽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요?”

나무는 이산화탄소와 물을 흡수하고 잎에서 빛에너지를 받아 탄수화물과 산소를 만들어내고(광합성), 산소를 이용해 포도당을 분해하여 에너지를 얻는 과정(호흡)을 통해 생명을 유지합니다. 따라서 광합성을 하고 호흡해야 하는 잎이 누렇게 변하거나 일찍이 떨어져 버리지 않았는지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나무가 죽었는지를 가장 쉽게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특히 잎이 누렇게 변해버렸다는 것은 잎에서 광합성을 하는데 꼭 필요한 엽록소가 모두 파괴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날 아침에도 기공(광합성과 호흡 과정과 식물체 내 남은 물이 빠져나가는 증산 작용 시 기체가 들고 나는 통로)이 여닫고 있는 지의 여부를 확인하고, 나뭇잎에 엽록소가 남아있는지 측정했으나, 영 가망이 없어보였습니다. 태풍에 대비하려고 온실 문단속을 꼼꼼히 한 탓에, 그날 밤 온실 속 나무들이 모두 쪄죽어 버린 것입니다. 저의 잘못된 조치로 죽게 된 것에 많이 괴로웠습니다. 누렇게 변해버린 잎 사이로 녹색빛깔을 띠는 잎을 찾아 확인했지만 결과는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괴로웠지만 그간 실험 나무들이 축적한 생물량이 얼마나 되는지를 측정하기 위해 잎과 가지를 모두 거두고 화분에는 뿌리만을 남겨두고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2주 후, 다 죽은 줄만 알았던 졸참나무 화분에서 새순이 돋은 게 아니겠어요? 모두 끝인 줄만 알았던 곳에서 새순이라니! 아차 싶었습니다. 찌는 더위에 잎과 가지는 그 기능을 다했어도 맹아력이 뛰어난 졸참나무의 뿌리는 아직 살아있었던 것입니다.
나무의 죽음에 대한 저의 오판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몇 해 전 초봄, 산에서 모니터링 해오던 어린 소나무의 윗머리가 똑똑 잘려나가고, 잎이 모두 누렇게 변해버린 일이 있었습니다. 소나무는 봄에 원줄기가 자라나게 하는 물질을 전 해에 윗머리에 저장해두고, 한 해에 1번씩만 자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 부분이 모두 잘려나갔으니 더는 자라지 못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또한 엽록소 파괴로 광합성을 전혀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했기에 당시에 조사기록장에 해당 나무들의 상태를 ‘죽음’으로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해 여름 감쪽같이 새순이 돋아났습니다. 줄기에는 여전히 새롭게 피어날 잠재력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 번의 오판을 통해, 나무의 죽음을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속단할 수는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가망이 없는 건가요?’ 열심을 내던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답답한 상황과 상하고 시들어버린 마음을 마주할 때면 종종 속으로 되뇌이곤 합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끝인 것만 같았던 그 지점에 새로운 길이 열리기도 하고, 허물어진 마음에 새살이 돋아나기도 하여 지금껏 삶이 계속되었습니다. 스스로 감각하지 못했던 어떤 잠재력이 ‘살아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함부로 그 ‘끝’을 속단하지 않을 일입니다.

박고은
서울대학교에서 산림환경학을 전공, 동대학원에서 건조지에 서식하는 비술나무의 특성에 대한 연구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국립산림과학원에서 임업연구사로서 우리나라 산림의 기후변화 적응, 높은 산의 침엽수가 후대를 잇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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