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 나는 뿌리반이야.”
올해 6살인 조카가 다니는 유치원에서는 원생 나이에 따라 씨앗반, 새싹반, 뿌리반, 줄기반, 꽃잎반, 열매반에 배정한다고 합니다. 땅 속에 묻혀있어 눈에 잘 띠지 않는 ‘뿌리’를 잊지 않고 포함시켰다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뿌리는 식물체가 땅에 자리를 잡고 하늘 향해 자라날 수 있게 몸체를 지지합니다. 또한 광합성과 생명유지에 필요한 물과 양분을 토양으로부터 흡수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지요.

얼마 전, 실험연구를 하는 온실 곁에서 크게 자란 소나무를 보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소나무가 찢긴 플라스틱 화분을 입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본디 땅에 심겨졌던 것이 아니라 실험용으로 화분에 심었던 어린 소나무가 몇 해 사이 화분을 뚫고 땅속으로 뿌리를 내린 것입니다. 사람이 부수기에도 단단한 화분을 찢는 뿌리의 위력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뿌리는 길이 방향으로도 자라지만 굵기도 자랍니다. 그래서 가로수로 심겨진 느티나무는 단 십 수 년 만에 인도 위 벽돌을 소복이 들어올리기도 합니다. 그만큼 뿌리의 힘은 셉니다.
그리고 뿌리는 영리합니다. 몸체에 무언가 결핍이 있을 때, 뿌리는 필요한 것이 있는 쪽으로, 생존에 유리한 길을 찾아 뻗어갑니다. 화분 속 소나무 뿌리도 아마 물과 양분이 훨씬 풍부한 땅을 찾아 내리 뻗었을 것입니다.

제가 대학원에 다니면서 논문 연구를 위해 몽골의 사막을 답사했을 때의 일입니다. 당시 저는 건조지 복원에도 활용되는 ‘비술나무(학명: Ulmus pumila)’가 건조한 환경에 어떻게 적응하여 생존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뿌리에 생존 비경이 있지 않겠냐는 지도교수님의 제안을 확인하기 위해 뿌리를 보고자 땅을 파고 또 파 보았지만, 도무지 제 힘으로 뿌리까지 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숙소로 돌아오는 길, 바람에 의해 모래가 침식되어 뿌리가 지상으로 드러난 비술나무를 만나게 되었지요. 신이 나서 그 길이를 재어보았는데, 100미터 줄자를 몇 차례 늘어뜨려도 뿌리의 끝을 볼 수 없었습니다. 나무의 키는 고작 3미터 안팎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끝없이 뻗어가는 뿌리 표면에서 다시 새순(맹아)이 돋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비술나무 뿌리가 척박한 환경에서 물길이 닿는 곳까지 제 몸의 백배가 넘는 길이만큼 뻗어나가는 것과, 그 와중에 뿌리가 줄기처럼 초록 잎을 틔운 것이 몹시 경이로웠습니다.

한편 최근 프랑스 연구진이 밝힌 바에 의하면, 뿌리는 중력의 방향을 감지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 비탈면에서도 몸체를 안정적으로 지지할 수 있는 평형점을 찾아 뻗어나갈 방향을 정하여 성장한다고 합니다. 작은 기울기도 민감하게 감지한다고 하니, 뿌리는 참으로 영리한 것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부단히도 열심히 제 역할을 하는, 강인하고 영리한 뿌리도 ‘숨’을 쉽니다. 그래서 뿌리 곁을 에워싼 흙 입자 사이에 공기가 드나들거나 물이 잘 빠질만한 공간(토양 공극)이 충분하지 않을 때는 뿌리도 제 기능하기가 어려워집니다. 또한 뿌리가 물과 양분을 더 잘 흡수할 수 있기 위해서는 땅속 여러 미생물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숨 쉬어갈 틈을 가지고 이웃과 서로 도우며 살아가야 하는 건 우리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박고은
현재 국립산림과학원에서 임업연구사로서 우리나라 산림의 기후변화 적응, 높은 산의 침엽수가 후대를 잇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저작권자 © 아름다운동행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