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어진 소망태국 이싼에 와서 놀란 것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기독교인들이 없다는 것과 목회자들이 교회를 개척하는 것을 무척 어렵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시작도 하기 전에 건물이 있어야 하고, 시설이 있어야 하고, 준비된 사람들이 필수적으로 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선뜻 개척을 시도하지 못한다. 가정에서도 예배드리고, 나무 밑에서, 들판에서도 예배를 드렸던 내 경험으로는 이런 모습이 큰 문화충격이 아닐 수가 없었다.그런데 쑤마닉 목사님을 만나고 나서는 그 선입견이 많이 깨졌다. 그는 모두가 필수라고 여기는 그런 조건들에 조금도 개의
원두막 주인3시간을 운전해 도착한 몬트리 목사가 사역하고 있는 마을에는 인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한창 밭에서 일할 시간이라 노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일하러 갔기 때문입니다. 또다시 걸어서 한참을 갔습니다. 사방이 잡초로 둘러싸인 들판 한복판에 작은 집이 덩그러니 있었습니다. 집이라기보다는 지붕과 마루만 얹어놓은 작은 원두막입니다.그런 집에 팔십 세 쯤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앉아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시각장애인이었고, 할머니는 허리를 다쳐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환자였습니다. 이 두 분이 허름한 원두막 집의 주인입니
방향 전환라오스 국경과 멀지 않은 태국의 한 시골 마을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현지 목회자를 통해 이싼이라 불리는 북동부지역의 처참한 선교 상황을 듣게 됐습니다. 어느 이슬람 국가보다도 열악한 기독교인 비율, 200여 년이 넘도록 성장이 멈춘 교회의 현실. 그분들의 단어에 녹아있는 모든 의미들은 마치 바울이 보았던 마케도니아 사람의 환상 같았습니다. 그렇다고 오랜 시간 동안 준비했던 계획을 한순간에 바꿔야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이곳에 오게 된 유일한 이유는 라오스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고 신실한 성도의 삶을
외국인 노동자교회개척 훈련 때 처음 만난 뿌 전도사는 숫기도 없어 보이고, 의도적으로 시선을 피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시골에서 교육도 받지 못하고 가난하게 자라 위축되어 그런가 싶었는데, 내가 한국인이라서 그랬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 사람을 무서워하는 트라우마가 있었고, 예수를 믿고 회복됐다고는 하지만 감정의 밑바닥을 건드리면 또다시 그 공포감이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뿌 전도사는 경제적으로 낙후하고, 모든 면에서 뒤처졌다고 알려진 이싼 지방 출신입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가족을 위해 돈을
가난이 만든 불씨이번 주에는 껀의 고향 마을을 방문했습니다. 그의 삼촌에게 예수님을 소개했지만 아직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차일피일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도움이 될까 싶어 동행했습니다. 집에 도착하니 삼촌은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온 목적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복음이 얼마나 위대한지 알고 있다면서 언제든 예수 믿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전도하기 쉬운 사람은 처음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껀의 영향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껀은 이 마을에서 결혼할 때까지 살았습니다. 자녀
배달 운전사찰리는 방콕의 복잡한 골목을 누비며 물건을 배달하는 UPS(화물 운송 서비스) 운전사였습니다. 가난한 태국 북동부 지역에서 태어나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어 대도시로 오게 됐습니다. 처음 방콕에 도착했을 때는 아는 사람도 없고, 특별히 배운 기술도 없어 직장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홈리스처럼 살면서 어떤 일이든 달려들어 했고, 사람들이 기피하는 일이라도 모조리 찾아다니며 해야 했습니다.그러다가 기적같이 들어간 곳이 UPS 배달이었습니다. 교통체증은 물론 길이 복잡하기로 유명한 방콕 거리를 운전하는 것이 보통 어
남학생들의 만남탄(가명)은 태국 북동부 지역의 대학교 4학년 남학생입니다. 그는 졸업 후 유명 휴양지에 있는 식당이나 바에서 일하려고 재학기간 동안 영어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학기를 남겨둔 이번 여름에 영어실력을 키울 기회를 갖게 됐는데, 미국의 대학생들이 영어 캠프를 위해 찾아온 것입니다.그는 만사를 제쳐두고 영어캠프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조셉(가명)을 만났습니다. 조셉은 대학교를 막 졸업하고 단기선교에 참여한 미국인 형제입니다. 조셉은 열정을 가진 탄을 다른 학생들보다 더 관심을 갖고 가르쳤습니다. 그런
바가지를 씌우다미국에서 대학생 60여 명이 여름 방학을 맞아 단기선교를 왔습니다. 사막에서 단비를 만난 것처럼 얼마나 힘이 됐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현지에서 도울 여건이 충분치 않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도 많았습니다. 당장 이들을 태우고 다닐 차량을 구해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시설이 좋은 미니버스 같은 것을 렌트하기는 어려웠습니다. 학생들은 이미 항공료 등으로 너무 많은 예산을 써버렸기 때문에 여력이 없었습니다. 고민 끝에 가장 서민적인 썽태우(작은 트럭을 개조해 만든 교통수단)을 활용하기로 했습니다. 이것의 단점은 정해진 요금이
문제아 학생대학에서 여름 영어캠프를 하면서 니파트라는 학생을 만났습니다. 그는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고, 학교생활에서도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은둔형 학생이었습니다. 외모도 시골 냄새가 풀풀 나는 사람인데다 호감형이 아니었습니다. 최신 유행에 민감한 대학생들이 그런 친구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이런 친구들의 반응을 모를 리 없는 그는 공동체 생활에서 점점 멀어졌고, 학업에도 흥미를 잃었습니다. 수업 시간에 잠을 자거나 아예 참석하지 않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성적은 낙제를 겨우 면할 정도였고, 선생님들도
알려진 부잣집떤(가명)의 가정은 부모 때부터 지금 그 자리에서 식당을 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진 유명 맛집입니다. 외부 사람들에게도 알려지기 시작해 평상시에는 손님들로 발 디딜 틈 없을 만큼 호황을 누렸습니다. 정해진 영업시간은 저녁 9시까지이지만 오후 2시 이후에는 거의 문을 닫습니다. 재료가 모두 소진되어 더 이상 음식을 만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무너지기 시작그런데 언제나 좋을 것 같았던 생활이 막내딸에게 악성 피부병이 발병하면서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약을 쓰고 의사의 치료를 받으면 금방 나을 것이라
무엇을 해도 안 된다한 교회에서 30년 이상 목회하는 것은 안정된 환경에서도 특별한 일입니다. 그런데 변화가 전혀 일어나지 않는 불모지 같은 환경에서 그 세월을 버텨낼 수 있는 것은 주님에 대한 사랑과 성도에 대한 책임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누니 목사님을 보면 그 이상의 무엇으로 가득 찬 사람 같습니다. 그래서 태국의 북동부지역, ‘이싼’이라 불리는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지역에서 40여 년을 보낸 목회자가 되었습니다.그가 젊었을 땐 열정도 있고, 에너지도 넘쳐 성도가 60명까지 모인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새
해도 해도 안 된다태국 이싼 지역에서는 ‘한 만큼 거둔다’는 말이 잘 안 통합니다. 해도 해도 제자리만 맴 도는 것 같은 일들이 많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이런 환경을 견디다 못해 지쳐 목회를 포기하든지, 그런 환경에 적응해 큰 꿈을 포기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합니다. 위라윳 목사는 전자를 선택한 사람입니다.그는 도시에서 40km 떨어진 작은 마을에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나름 열악한 지역에서 의미 있는 사역을 하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너무 높았습니다. 이싼 지역 전체 기독교인
공황장애 대학생어두운 숲속에 있던 돌이 빛을 받으면 다른 것보다 더 빛을 내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사람 중에도 그런 돌과 비슷한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라오스 국경의 태국에서 만난 조이(Joy)가 그런 사람입니다. 그녀는 태국인이라면 누구나 살아가는 태국인스러운 삶을 살던 사람입니다. 어릴 때부터 불교 사찰에 정기적으로 봉양을 하고, 때가 되면 불교 의식에 참여하여 공덕을 쌓습니다. 불교를 믿는 것이 태국인이고, 그것을 떠나는 것은 민족성을 버리는 것이라고 믿습니다.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는 공황장애를 앓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렵게 시작한 자립선교를 어렵게 하는 조건들이 여럿 있지만 그중의 하나가 ‘현지인 목회자의 자립’입니다. 보통은 정기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의존성만 키우는 독약이 될 수 있습니다. 나중에는 스스로 해보겠다는 의지조차 잃어버리고, 외부의 도움이 없으면 사역을 포기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살아갈 여건이 안 되는 목회자를 외면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자립 프로그램을 얼마나 지혜롭게 시작하느냐가 자국민 주도의 선교를 앞당기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라오스 오지에서 사역하는 쏨싹 목사도 사
선교 불모지, 태국선교 현장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지만 이해가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태국의 선교 현실이 그중 하나입니다. 가장 자유로운 나라가 아시아에서 복음화율이 가장 낮은 선교의 불모지라는 사실.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치면 될 것 같은데 왜 안 되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라오스, 태국 목사님들이 모이는 훈련에서 한 번 시도해 보기로 한 겁니다.오전에는 전도 방법을 가르치고 오후에는 그룹을 나누어 마을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전도 전문가마을로 떠나는 첫날 아침, 한 태국 목사님이 나를 찾아왔습니다. 자신은 오후에 마
정체불명의 방문자들싯톳 목사님은 사역자 모임에 참석하려고 채비를 서두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아침 정체불명의 남성들이 그의 집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왜 도시로 가는지, 모임의 내용이 무엇인지 등을 꼬치꼬치 캐물었습니다. 그리고 마을을 떠나지 않는 게 좋겠다는 협박 같은 말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싯톳 목사님은 아랑곳 하지 않고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오토바이를 타고 출발했습니다.식구들은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부터 마을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탐탁지 않게
남쏭 마을의 조폭태국 북동부의 작은 마을, 남쏭에서는 쌀링 목사님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무서운 사람으로,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닮은 사람으로 기억합니다.그는 주님을 믿기 전 이 지역에서 악명 높은 조폭 두목이었습니다. 그의 무리들은 총을 휴대했고 마을을 다니며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그날도 이웃 마을에서 범행을 저지르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습니다. 마을을 빠져 나오는데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랫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는 그 소리가 나오는 집을 따라가 성경공부 중이던 성도들을 발견했고, 그곳에 앉아있던 한 소녀가 눈
팬데믹의 그늘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을 거치며 선교지 교회들은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교회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고, 목회자들 중 바이러스로 사망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농사는 엉망이 되어 목회자들은 자기 가족뿐만이 아니라 성도 가정을 챙기느라 더 무거운 짐을 져야 했습니다. 지난 2년여 시간은 인생의 가장 깊은 수렁 같았다고 고백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이렇게 육적으로, 심적으로 지쳐있는 목회자들을 한자리에 모았습니다. 라오스의 목회자들은 국경을 넘어 태국 훈련센터에 도착했고, 가장 복음화율이 낮다는 태국 북동부 지역의 태국인 목회자
관심도 없던 나라고향집을 선교센터로 사용하도록 허락해 준 바차리 할머니(2022년 4월호)를 만나고 나서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그분의 부모님들이 생활하던 작은 방은 선교 활동 지휘소로 바뀌었고, 아무도 오지 않던 낡은 집은 부흥을 꿈꾸는 이들의 기도 공간이 되었습니다.할머니 덕분에 이싼 지역에 선교할 마음도 생겼습니다. 사실 태국 선교에 대해서는 그동안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나라에는 선교사도 많고, 선교자원도 충분하다고 판단해 시급한 선교지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복음을 전하는 것도 자유롭고,
오지마을 관광 가이드‘왓’은 여행사 직원이었습니다. 주로 오지에 사는 소수민족 마을로 관광객을 가이드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습니다. 관광객들이 쏟아져 들어올 때는 수입도 괜찮았고, 힘든 노동을 하지 않아도 남들보다 더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은 꿈의 직장이라며 부러워했습니다.단점이라면 신앙생활을 규칙적으로 하기가 어렵다는 겁니다. 산속에 사는 소수민족 생활 체험은 한번 출발하면 며칠이 걸리는 프로그램이라 주일예배 참석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고, 성도들과의 만남이나 성경공부도 점점 소홀해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