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초등학생이 말한다.“학원 다니느라, 숙제하느라 친구랑 놀 시간이 없어 엄마에게 힘들다고 말했더니 ‘어른 되면 더 힘들어’라고 말씀하셨어요. 어른이 될수록 더 힘들어지면 왜 지금 이렇게 열심히 살아야 하나요?”아무리 노력해도 더 힘든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니. 왠지 낯설지 않은 말이다. 나이가 적든 많든 이 땅에 사는 모든 이들이 동일한 시선으로 미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진학, 취업, 건강, 노후대책 등 충분히 예상되는 과제들이 ‘지금’ 우리의 발밑을 흔든다. 그러니 우리가 불안해 하는 것은 당연하다.하지만 발밑이 흔들려
코로나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마스크를 쓰는 일이 아니었다. 나중에는 자연스레 마스크를 안경 끼듯이 쓰고 다녔던 걸로 기억한다. 그것보다는 사랑하는 이들을 쉽게 만날 수 없음이 가장 힘들었던 경험 아닐까. 그나마 국내에 거주하는 이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만날 수 있었지만 해외에 떨어져 있는 경우는 정말 만나기가 힘들었다. 전화도 있고, 화상 채팅도 할 수 있는데라고 할 수 있을까. 만남은 원래 눈을 마주보며, 손도 잡아보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고개를 끄덕임이 한데 어우러지는 것이기 때문이다.그렇게 귀하기만 했던 만남이 코로나
꿈꾸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꿈을 향해 나아갈 여력이 없는 사람일까, 아니면 바라는 것이 없는 사람일까, 잘하는 것이 없어서일까, 나이가 많아서일까, 건강이 따라주지 않아서일까. 소유하던 꿈을 도둑맞은 걸까, 아니면 처음부터 꿈조차 꿀 수 없는 삶을 살아왔던 것일까. 그 어떤 쪽이든 꿈 하나 소유하지 못하고 사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아니, 크게 보면 변화를 기다리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큰 손해일 수 있다.변화의 현장에는 늘 꿈꾸는 한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의 꿈은 그래서 무시할 수 없다. 1963년 8월 28일 미국
일러스트=초록담쟁이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연극 . 크리스마스 성극 중 여관주인을 맡은 덕구는 지적으로는 조금 부족한 아이. 이제 순서가 되어 만삭인 마리아와 요셉에게 ‘빈 방이 없다’라고 해야 하는데, 아이는 머뭇거린다. 그리고는 매몰찬 답변 대신 “내 방이 있어요, 내 방을 사용하세요!”라고 겨우 소리친다. 나로 꽉 차서 누군가에게 한 뼘의 공간도 나누지도, 열지도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네 마음을 두드린다.누군가를 환대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환대받지 못했던 아기 예수를 생각하게 하는 크리스마스에 우리가 새겨야
만나면 묘하게 기분이 나빠지는 사람이 있다. 평소에 무례한 사람이라면 원래 그러려니 싶을 텐데, 예의바른 태도와 말, 표정인데도 묘하게 불쾌한 사람이 있다.“만나고 나서 느낌이 그저 유쾌하지 않았었는데, 어느 순간 왜 그렇게 느껴왔는지 알겠더라고요. 친절하게 대해주고, 웃고, 말을 걸어주기는 하지만 ‘너와 나는 다르다’는 선이 있었어요. ‘아, 이거였구나, 그래서 그동안 기분이 상했던 거구나’ 싶었어요.”이런 경우는 사람을 대할 때 카테고리를 묶어서 명명한다던지, 사람을 ‘주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완성시켜주는 ‘소
1. 몸을 솟구쳐서 어떤 물건이나 장소를 넘다.2. 거쳐야 할 과정, 순서, 단계를 거치지 않고 지나가다.3. 어려운 일을 이겨내다.4. 어떤 범위나 수준을 훨씬 넘어서다.여러 가지 뜻을 가진 ‘뛰어넘다’는 각자 다르게 경험되어진다. ‘뛰어넘어’ 자신을 도왔던 이들 때문에 살 힘을 갖게 되기도 하고, 어떤 이는 한계를 ‘뛰어넘는’ 삶을 보여주며 희망의 아이콘이 되는 등 ‘뛰어넘다’란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의 스펙트럼은 넓다.장애인 예술가 육성을 위해 활동하는 한국장애인국제예술단 배은주 대표 이야기 안에는 이 모든 내용들이 다 담
일러스트 = 초록담쟁이가족에 대해 공부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난 도대체 왜 이러지?’, ‘저 사람은 대체 왜 그런 걸까?’를 묻던 이들이 자신과 타인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원인 가운데 ‘가족’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예전에는 ‘힐링’에만 관점을 두던데서, 이제는 보다 근본적인 해법을 찾으려 노력한다.“제가 여행 갈 때 거의 이민가방 들고 가듯이 준비하거든요. 남편이 사서 쓰면 된다고 해도 불안해서 못 그래요. 두루마리 휴지까지 들고 가곤 하니까요. 안 그러고 싶은데.”한 여성이 자신의 고민을 드러냈다. 상담자와 함께
“내가 잘 살고 있는 줄 알았어요.”하루를 바삐 살던 회사원 A씨는 ‘바쁜 것이 옳다’ 여기며 바쁘지 않은 이들을 보면 속으로 ‘게으르다’고 흉까지 봤다. 그러던 어느 날, 병이 찾아왔다. 급하게 찾은 병원에서는 ‘그동안 잘못 살았다. 그렇게 살면 건강이 이렇게 망가진다’라고 말해주었다.뭐가 잘못된 걸까. 열심히 살았는데, 바쁘게 살았는데…. 억울한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삶을 되짚어보았다. 뒤돌아보니 바쁘다는 이유로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좋은 사람들과의 관계, 좋은 순간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러지 말걸.B씨는 그릇 모으기가
의 저자 페터 볼레벤은 자신이 관찰한 숲속 이야기를 이렇게 들려준다.키가 큰 나무들로 빽빽한 숲, 그 그늘로 인해 햇빛이 바닥까지 도착하기 어려워 아기 나무들은 적은 빛이나마 최대한 붙들어야 한다고. 그러던 어느 날 몇 백 년 된 큰 나무가 병이 들거나 폭풍으로 쓰러지게 되면 그 빈자리는 아기 나무들에게는 출발의 신호탄이 된다고. 이제는 마음 내키는 대로 광합성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자면 신진대사를 바꿔야 하고 강해진 빛을 참고 소화해야 하지만 말이다. 그렇게 열심히 성장한 나무도 언젠가는 어른 나무가 되어
전문가들은 코로나 사태 장기화로 인해 자살 고위험군이 확대되고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들을 향한 ‘돌봄’이 절실하다. 만나기 어려울수록 돌봄의 필요는 높아지는 이 시대, 우리는 어떤 ‘돌봄의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 헨리 나우웬이 에서 말한 대로 “우리 시대의 가장 비참한 단면 중 하나는, 우리가 세상의 고통과 고난을 이전 어느 때보다도 많이 알면서 거기에 점점 더 반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보자. 코로나뿐 아니라 곳곳에서 고통과 고난이 넘치는데 그 아픔이 더 멀어지고 있는 건 아닌지. 구석구석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우리가 미처 못 보고 있는 무심함을 인정하고, 우리가 돌볼 사람들의 단위를 확장시켜야 할 시점이다. 그 돌봄을 함께 해가며, 지치지 않기 위해 자신의 돌봄도 함께
“기대하고 있어. 네가 잘 할 거라고.” 부모님이 계속해서 아이에게 들려준 이 말은 굴레가 되었다. 부모의 기대에 맞춰 살아야 한다는 부담감은 늘 조이는 듯 했다. “나는 진짜 네가 기대가 된다.” 자신감이 없던 아이에게 선생님은 이 말을 건넸다. 아이는 그 말을 들은 후 훌륭하게 성장했다. 힘이 들 때마다 아이를 일으켜 세워준 것은 선생님의 그 말이었다. “잘 되겠어? 내일도 똑같겠지.” 좋은 내일이 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말하는 사람들. 그래서 잠들며 하루를 마감할 때 더욱 불행해진다는 사람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 모르세요? 난 믿어요.” 마거릿 미첼의 소설 속 스칼렛 오하라의 마지막 대사를 얘기해주며 이렇게 말한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자신의 농장을 바라보며 다
그런 경험이 있지 않은가. 해질녘 노을을 바라보는데 가슴이 왠지 뭉클해진다거나, 곡명도 모르는 음악을 듣다가 눈물을 흘렸던 기억, 힘을 합쳐 어려운 이웃을 도왔을 때의 그 기쁨 등 우리 모두에게는 ‘감동’의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을 소환시키는 그 순간만이라도 삶의 온도 역시 달라지고. “그런데 생각해보니 요즘에는 감동한 기억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왜 그럴까요?” 단 몇 초라도 멈추어 서서 감동받는 순간을 누리기보다는 끊임없이 ‘휘발’되는 정보를 보여주는 스마트폰에 집중하며 살고 있는 현대인들. 깨어 있는 시간의 3분의 1을 사용한다고 하니 ‘감동’이 아닌 ‘자극’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며 살고 있는 것. “사람들은 예술이나 음악을 즐기거나 주말에 자연 속에서 시간을 보내기보다 무언가를 소비하는 데 시간을
폴 빌라드의 소설 . 혼자 사탕가게에 간 소년은 사탕을 고르고는 주인 손에 사탕 값으로 은박지로 싼 버찌씨 여섯 개를 건넨다. 당황하여 머뭇거리는 주인 위그든 씨를 보자 소년은 근심스럽게 모자라느냐고 묻는데 그는 “돈이 좀 남는구나. 거슬러 주어야겠는데”라며 소년에게 2센트를 건네준다. 아이는 나중에 어른이 되어 아내와 외국산 열대어를 파는 장사를 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소년이 물고기를 사겠다며 값비싼 열대어를 고르더니 자신 있게 5센트짜리 두 개와 10센트짜리 한 개를 내놓았다. 기쁨과 기대에 찬 눈. 그 순간 소년, 아니 열대어 가게 주인은 먼 옛날 위그든 씨를 떠올렸다. 그리고는 돈이 남는다며 아이에게 2센트를 건넨다. 자신만의 방식과 생각을 고집하며 경직되게 살아가는 이들이 넘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거울은 대답한다. 왕비님도 예쁘시지만 백설공주가 가장 예쁘다고. 백설공주의 새엄마이자 한 나라의 왕비인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실망과 분노가 엇갈린 속에 그녀는 공주를 없애고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자가 되기로 한다. 비극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백설공주가 가장 예쁘다고 대답한 거울의 답변부터일까 아니면 거울만 들여다 볼 때부터 였을까. 엄마 잃은 가여운 아이의 따뜻한 엄마가 되어준다거나 백성들을 위해서 좀 더 마음을 쓰며 살 수 있었을 텐데. “이들은 사회적으로 잘 적응하지 못하고 대인관계에서 호혜성을 수립하는 데 꼭 필요한 최소한의 자기 희생도 감당하려 들지 않는다. 어릴 때 자기가 특별하다는 거품이 빠지지 않은 아이는 타인이 항상 자신의 뛰어
익히 알고 있는 우화 하나. 까마귀는 새들의 왕을 뽑겠다는 신 앞에 다른 새들의 깃털을 주워 치장하고 온다. 온통 까만 자신의 모습으로는 새들의 왕이 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까마귀의 원래 모습은 곧 들통 나게 된다. 꾸며도 자신은 ‘까마귀’였던 것이다. 지금 세상에는 이렇게 자신을 꾸민 까마귀들이 많다. ‘보여주기’ 위해서 자신의 것이 아닌 것들로 잔뜩 꾸미고 자랑한다. 그렇게 넘쳐나는 자랑들 속에 ‘진짜’는 무엇일까. 데이비드 룩스 작가는 이 시대를 ‘자기중심성의 시대’라고 말한다. 성취를 중시하는 문화에서는 타인의 인정을 받는 데 몰두하며, 외적인 찬사를 삶의 척도로 삼는다. 사실 우리 모두 이렇게 하고 싶은 욕망에 시달린다. 그런데 성숙은 그 욕망과 끊임없이 싸울 때 이루어
아직 쌀쌀한 날씨 가운데 여전히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일상이지만 분명 봄내음이 난다. 봄색이 완연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봄이 오고 있다. 연두빛 새싹이 돋아나는, 다시 도전하는 시간. 그러나 모두에게 같은 설렘으로 다가올까. 누군가는 자신의 나이를, 건강과 처지, 조건 등을 살피며 자신의 봄은 이제 없다고 여긴다면 어떻게 다시 봄을 맞을까. ‘사람은 생각하는 사람과 고민하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 이 둘은 모두 자신이 생각하며 살고 있다고 믿지만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간다. 고민하는 사람의 생각은 진짜 생각이 아니다. … 고민하는 사람은 온갖 변수에 파묻히고, 생각하는 사람은 상황을 발판 삼아 도약할 하늘을 바라본다.’ - 정종원 그동안 ̒고민̓ 위에만 서있었다면 이제는 ̒생각̓으로 한
“기다릴 수 없는 사회가 되었다.” 예전에는 기다리는 것이 일상이었다. 언젠가 도착할 편지를 기다리고, 열매가 익기를 기다렸다. 그래서인지 기다림에 필요한 ‘근육’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모든 것이 시간의 지체 없이 처리되는 요즘, 기다리게 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 일이 되었다.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빠르게 돌아간다 한들 여전히 ‘기다림’이 필요한 영역들이 있다. 누군가의 성장과 성숙은 우리 마음대로 쉽게 이루어지지 않으며, 꼭 그만큼의 기다림이 필요하다. 기다리는 것이 쉽지 않을 때 중국 극동지방에서 자라는 모소 대나무를 기억해보자. 씨앗이 뿌려진 후 4년 동안은 3cm만 자라다 5년이 되는 해부터 매일 30cm씩 성장해 6주 만에 15미터 이상 자라 대나무 숲을 이룬다는. 기다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일을 아주 많이, 빨리 하는 사람이었지요. 영혼은 어딘가 멀리 두고 온 지 오래였습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 올가 토카르축의 첫 구절이다. 평범한 한 남자가 어느 날 통증과 함께 그 어떤 것도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의사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가 영혼을 잃어버렸다는 것. 그날부터 그는 작은 집에서 천천히 자신의 영혼을 기다리기 시작한다. 어쩌면 우리는 꽤 오랫동안 그런 상태였는지 모른다. 그런데 코로나라는 몹쓸 병이 우리에게 닥치자 이제야 우리가 자신의 영혼을 기다려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는지도. 어떻게 기다리는 것이 나을까. 아니, 어떻게 맞이하는 것이 나을까. 새해를 열며 특집 ‘글로 쓰다’를 마련했다. 한 해를 어떻게
“소아암 환자에게 제 머리카락을 기부할 거예요.” 그렇게 말한 아이는 그 긴 머리를 싹둑 잘랐다. 항암치료를 받고 머리카락이 빠진 소아암 아이들이 간혹 놀림이나 시선에 힘들어할 수 있다는 것과 가발 구입이 힘든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한 결정이었다. ‘어린 암환자들을 위한 머리카락 나눔운동’을 하고 있는 어머나운동본부에 머리를 기부하고 온 아이는 그 날 이렇게 얘기했다. “길러서 또 기부할 거예요!” 위기의 가족공동체를 돕는 사역을 하는 스탠드업커뮤니티 김태양 대표의 17세 딸의 이야기다.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자로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의 경험을 담은 저자 빅터 프랭클이 인간의 생명력에 관해 생각을 다시 하게 된 장면이 있다. 깡마른 몸에 무거운 발을 이끌고 작업장을 향하는 한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1860~1961). ‘모지스 할머니’로 불리는 이 화가는 75세의 늦은 나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늦깎이 화가다. 농장에서 가정부로 일하기도 했고, 결혼 후에는 아내와 엄마로 평범하게 살아왔던 그는 딸이 사다준 화구로 75세 나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평생 그림을 배워 본 적 없었지만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들과 평생 보았던 목가적인 풍경을 그녀만의 사랑스러운 방식으로 그려냈고, 결국 그 그림들은 미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88세에 ‘올해의 젊은 여성’으로 선정되었고, 93세에 지 표지를 장식했으며 100세 되던 생일날에는 뉴욕시가 ‘모지스 할머니의 날’로 선포할 정도였으니. 그 나이에 무슨 그림을 그리느냐고 말했던 이를 향해 모리스 할머니는 이렇게 이야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