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에 매몰되지 않을 때

“소아암 환자에게 제 머리카락을 기부할 거예요.”
그렇게 말한 아이는 그 긴 머리를 싹둑 잘랐다. 항암치료를 받고 머리카락이 빠진 소아암 아이들이 간혹 놀림이나 시선에 힘들어할 수 있다는 것과 가발 구입이 힘든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한 결정이었다. ‘어린 암환자들을 위한 머리카락 나눔운동’을 하고 있는 어머나운동본부에 머리를 기부하고 온 아이는 그 날 이렇게 얘기했다.
“길러서 또 기부할 거예요!”
위기의 가족공동체를 돕는 사역을 하는 스탠드업커뮤니티 김태양 대표의 17세 딸의 이야기다.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자로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의 경험을 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저자 빅터 프랭클이 인간의 생명력에 관해 생각을 다시 하게 된 장면이 있다. 깡마른 몸에 무거운 발을 이끌고 작업장을 향하는 한 유태인 포로가 고인 빗물에 마른 나뭇가지가 비친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아, 이것 좀 봐. 렘브란트의 풍경화보다 아름답잖아.”
이런 환경에서 살아남는 힘은 강한 의지나 튼튼한 몸이 아니라 섬세한 감성에서 솟아난다는 것, 달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자, 귀뚜라미 소리에 잠을 잊은 채 밤을 지새우는 사람, 어려워도 자신의 것을 더 어려운 이들과 나누는 자, 이런 여리고 섬세한 내면성을 가진 사람들이 결국 살아남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2020년을 살아내면서 우리는 어떤 태도였을까. 얼마나 많은 숫자의 소용돌이 속에서 울고 또는 불안해했는가. 특집 ‘숫자를 이해한다는 것’에서는 자신의 숫자에 매몰되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다독이며 살아갈 때 삶의 기품을 잃지 않을 수 있으며 그게 우리를 더욱 강하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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