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몰트만 이야기

특집 : 그래도 꿈꿔야 한다

포로수용소, 꿈꿀 수 없는 곳

구약성경 <에스겔>은 유다 왕국의 마지막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주전 604년부터 바벨론은 고대 중동 세계를 오롯이 하고자 한 느부갓네살 왕이 다스린다. 이러한 위협 속에서 유다의 지도층은 또 다른 강대국 애굽에 기대어 스스로를 지키려고 한다. 이에 느부갓네살은 주전 597년에 예루살렘을 무너뜨리고 어린 임금 여호야긴과 유다 상류층 인사들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간다.

이때 끌려간 무리 중에 에스겔이 있었다.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힘 있게 하시기를!’. 그러나 청년 에스겔의 삶에 하나님은 함께 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유다에서 살 때는 제사장 집안 출신으로 앞길 창창한 청년이었을지 몰라도, 나라가 깡그리 망한 상황 속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피식민지 국가의 청년일 따름이었고, 그의 삶의 자리는 ‘포로수용소’일뿐이었다.

“그 때에 내가 포로로 잡혀 온 사람들과 함께 그발 강 가에 있었다.”(에스겔 1장 1절)

‘희망의 신학자’로 불리는 몰트만은 1926년생 독일출신으로 물리학자가 될 꿈을 품고 자랐다. 그러나 18세가 되던 해 나치 군대에 징집되어 군인이 되었다. 당시는 2차 세계대전 막바지, 유럽은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몰트만은 이 때 영국군에 포로로 잡혀 수용소 생활을 했는데, 그 속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나의 하나님,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참화 속에서 처음으로 신학적인 질문을 던진 것이다. 악귀들이 판을 치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 거기에 하나님은 보이지 않았다.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는 실종된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이었지만 청년 몰트만은 감내하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절망은 희망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 어떤 길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생긴다. 에스겔도, 몰트만도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몰트만은 “절망은 희망을 전제한다”라고 말한다. 그는 “절망이란 무언가를 희망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어거스틴), “절망하는 사람은 더 이상 무언가를 바라지 않으려고 한다.”(토마스 아 켐피스)는 인용으로 절망과 희망의 상관관계를 설명한다. 한 톨의 희망조차 품을 수 없는 곳에서 몰트만과 에스겔은 과연 꿈을 꿀 수 있을까?

천국 아닌 곳에 희망이 있다

포로수용소에 갇힌 두 사람 에스겔과 몰트만. 둘 사이에는 먼 시공간적 차이가 있었지만 ‘역사는 반복 된다’는 명제 아래, 비슷한 운명을 공유하고 있었다. 둘 다 청년이었고, 원하지 않는 큰 전쟁의 피해자였다. 기성세대의 국제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전쟁이 일어나면 피해를 보는 것은 언제나 젊은이, 어린이, 여성들. 주전 6세기 지중해 연안이나, 20세기 유럽이나 매한가지다.

먼저 에스겔은 1~33장에서 굉장히 많은 양을 ‘파멸’, ‘심판’, 회개촉구‘의 주제에 할애했다. 희망적인 메시지는 34장 이후에 등장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양떼처럼 돌보아 주겠다는 말씀(34장 11절), 마른 뼈처럼 죽어있는 이스라엘을 다시 살리는 환상(37장 1~14절), 예루살렘이 회복되고 새로운 성전이 들어서게 된다는 비전(40장 이하) 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적인 메시지는 1~33장의 처절한 상황을 전제로 한다.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이웃 나라들도 함께 망하는 상황 말이다.

몰트만은 태어나면서부터 기독교인이었지만, 그가 어릴 때부터 배운 하나님 나라와 현실은 너무나도 달랐다. 그래서 그는 <희망의 신학>이라는 저서에서 약속은 언제나 모순적이라고 설명한다.

“약속의 특징은 모순성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미래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미래의 약속은 현실에 모순된다.”(2장. 약속과 역사 중)

그러나 역으로 생각해 본다. 모순적인 현실 없는 미래의 약속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미래에 약속된 이상적인 세상이 현실과 똑같다면 희망을 품을 이유가 없다. 아마도 그런 세상에서는 꿈이나 희망이라는 것이 무의미할지도 모르겠다. 모든 기독교인이 궁극적으로 꿈꾸는 ‘천국’에서도 희망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참된 천국이 아닐 것이다.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 역시 포로수용소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포기 말고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었던 몰트만이 ‘평화가 이루어진 세상’, ‘하나님의 정의와 공평을 이루어가는 교회’, ‘성서적인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는 종말의 때’를 신학적으로 풀어내는 데에는 ‘희망을 품을 수 없는 환경’이 가장 중요한 경험이 된 것이다.

오늘, 우리도 꿈꾸기 위해

어제오늘 우리는 날마다 전쟁 소식을 마주한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싸우고, 하마스와 이스라엘이 싸운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죽어 나가는 것은 청년 군인들과 죄 없는 민간인. 어찌 이토록 변함이 없는지.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정치인이 테러를 당하고, 이해할 수 없는 사고로 수백 명의 어린 생명과 청년들이 죽음을 맞기도 한다. 비단 사회적 이슈들뿐이랴.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고민과 갈등, 여러 형태의 삶의 문제들을 경험하며 산다. 그러니 에스겔과 몰트만의 포로수용소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독립운동가이자 한국적 기독교 사상가, 비폭력 평화운동가로 불리는 함석헌은 살면서 여덟 번 감옥에 갇혔다. 89년의 세월은 ‘고난’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감옥 경험을 “인생 대학”이라고 회고한다. 옥에 갇혀 인생을 배우고 미래를 꿈꿀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 매우 역설적이지만 이러한 세상이기에 우리는 오늘도 꿈꾼다. 꿈 꿀 필요가 없다면, 그곳은 현실이 아닌 천국일 터. 바랄 수 없는 상황, 그곳에서 새로운 꿈이 시작되기를.

민대홍

서로교회 담임목사. 파주 출판도시에서 목회와 더불어 책 만들고, 글 쓰는 자비량 목회자다. 한국기독교 역사 연구자이며 본지 객원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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