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슬픈 인생조차 끝까지 사랑해야

 

특집 : 앞으로, 앞으로

삶, 희극도 비극도 아닌

삶은 가진 자에게는 희극이며 갖지 못한 자에게 비극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삶을 희극과 비극으로만 구분하는 것은 단편적 시각이다. 삶을 의미하는 한자어 ‘생(生)’은 “소(牛)가 외나무다리(一) 위를 걷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삶을 ‘네 발 가진 거대한 몸집의 소가 좁고 얇은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것처럼 위태롭고 위험한 것’으로 해석한 그들의 통찰이 놀랍다. 또한 작가 알베르 까뮈는 <시지프스의 신화>에서 “인간의 삶은 무거운 돌을 어깨에 메고 산의 꼭대기에 다다르면 그 돌이 다시 굴러 떨어지고, 떨어진 그 돌을 다시 어깨에 메고 다시 산 정상에 올라가는 형벌을 영원히 받는 시지프스의 삶과 같다”했다.

구약의 족장 야곱에게서도 이런 시각이 발견된다. 노년의 야곱은 이집트 권력자 파라오와 대면하게 되는데, 나이를 묻는 파라오에게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세기 47장 9절)라고 대답한다. 야곱은 자신의 삶을 ‘험악한 나그네의 삶’이었다고 진술한다. 시인 최승자는 “나는 인생이 희망찬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일찌기 눈치챘다”라는 시어를 통해 이런 말을 지지한다. 그렇다. 삶은 가진 자나 갖지 못한 자 모두에게 위험한 것, 무거운 것임은 틀림없다. 그렇다고 무거운 삶에 굴복된 채 자신의 삶을 체념과 절망에 방치하는 것은 옳은 태도일까?

퇴보, 답보, 진보

직립 보행하는 인간의 걸음걸이는 ‘세 가지’다. 뒤로 걸어가는 퇴보(退步), 제자리걸음하는 답보(踏步), 앞으로 걸어가는 진보(進步)이다. 그 중 퇴보나 퇴각이 전쟁에 패한 군사의 걸음걸이이며, 답보는 나태와 게으른 사람의 걸음걸이고, 앞으로 걸어가는 진보는 희망을 간직한 진취적인 걸음걸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걸음걸이만 그럴까. 삶도 그렇다. 삶이 위험하다는 이유로 자기 삶을 일탈과 방탕에 맡기는 퇴행적 태도는 ‘삶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삶이 무겁다는 핑계로 자기 시간을 불만과 불평으로 탕진하는 낭비적 태도는 자신을 통해 더 나은 미래를 창조하시려는 하나님의 꿈을 거절하는 불경건이 된다.

요셉의 아름다움은 은 20개에 팔려간 노예에서 이집트의 총리로 등극한 ‘신분상승’에 있지 않다. 형들의 시기로 노예로 팔려가고,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거절한 까닭에 투옥되고, 자신에게 도움을 받은 술 맡은 관원에게 배반당하는 고통 속에서도 ‘자신에게 꿈을 주신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며 자신의 슬픈 인생조차 끝까지 사랑했다’라는 사실에 있다. 기적과 기회는 자기 삶을 귀중히 여겨 어제보다 오늘 한 걸음 더 진보하는 자에게 허락된다.

가슴에서 지옥을 꺼내라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는 “아침에는 불안이 문을 두드리고 저녁에는 절망이 문턱을 넘어오는 곳이 지옥이다”라고 했다. 지옥을 사후(死後)의 공간만이 아닌 ‘불안과 갈등과 원망에 지배를 받는 현실의 삶’이라는 뭉크의 해석에 동의한다. 그렇다. 꿈과 희망을 잉태할 수 없는 상태가 지옥이다. 이런 까닭에 자신의 삶을 불평과 불만으로 채우고, 원망과 절망에게 주도권을 내어주는 것은 스스로 지옥을 만들고 그곳에 갇혀 사는 것과 다름이 없다.

시인 이윤설은 “가슴에서 지옥을 꺼내라”라고 권유한다. 현실에 대한 분노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점철된 심장 속에서 기생하고 있는 좌절, 포기, 증오를 꺼내서 멀리 던져버려야만 ‘참 살이’를 살 수 있다는 권고는 설득력을 지닌다.

동방 으뜸의 재산과 권세와 명예를 누렸던 구약의 욥이 한 순간에 파산한다. 처음부터 가난했던 사람은 가난에 재앙 하나가 더 추가되어도 견딘다. 그러나 모든 것을 누렸던 사람이 가난해지면 한 순간에 전락과 몰락으로 치닫는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삶을 학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순간 ‘모든 것의 주권자’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더 깊게 발견하고 입술로 찬양한다(욥기 1장 21절, 2장 10절). 작가 헤밍웨이가 소설 <노인과 바다>에서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인간은 파멸할 수는 있어도 패배할 수는 없어”라는 선언이 이미 욥에게서 실현되었던 것이다.

겨울을 이긴 봄

모든 봄은 ‘겨울을 이긴 후’에 찾아온다. 겨울을 이기지 못한 3월은 그저 날짜만 바뀐 겨울일 뿐이다. 놀랍게도 자연은 단 한 번도 ‘겨울에게 진 봄’을 허락하지 않았다. 냉골과 한설(寒雪)의 동토(凍土)를 꺾고 푸른 순과 꽃이 향기를 발산하는 따스한 대지를 늘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봄이 온다는 것은 여전히 희망이 살아있다는 반증이다. 3월의 봄은 위험하고 무거운 삶이 던져주는 낙심과 절망에 떠는 그대에게 ‘겨울을 이 긴 봄’처럼 ‘멋진 전면전(全面戰)을 펼쳐보라’라고 격려하며 설득하는 희망의 시절이다. 그렇다. 봄은 누워 있던 사람을 앉게 하고, 앉아 있던 사람을 걷게 하고, 걷던 사람을 뛰도록 촉구하는 성찰의 시간이며 약동의 계절이다. 이런 이유로 봄은 가을보다 훨씬 철학적이다. 따라서 봄을 즐기는 사람은 ‘여행가’가 되지만, 봄을 생각하는 사람은 ‘철학자’가 된다.

담을 넘는 담쟁이처럼

누구에게나 삶은 버겁다. 아침에는 높은 벽을 만나고 낮에는 깊은 강을 만나며, 저녁에는 거대한 산을 만난다. 이런 장애물들은 곧잘 그대의 발걸음을 퇴보나 답보로 이끈다. 삶의 무게에 눌려 신음하는 그대에게 시인 안도현은 “저것은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넘는다”라고 말해준다.

위험하고 무거운 삶에 저항하여 승리하려면, 비록 느린 속도지만 결국은 높은 벽을 넘어서는 담쟁이의 분투가 필요하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죽음과 병행하는 삶을 살아야 했던 다윗은 죽음보다 훨씬 강한 하나님을 ‘자신의 유일한 동행자’로 선택한다. 그 결과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 넘나이다”(시편 18편 29절)라고 찬양하기에 이른다. 자신의 삶이 절망에 묶여있는 “출구(出口) 없는 현실”임에도 담쟁이의 마음을 붙잡고 분투할 때 하나님께서는 높은 담을 뛰어넘게 하시는 신비를 넣어두기를. 그리하여, 밝고 가벼운 보폭으로 희망과 평화를 향해 걷는 계절이 되길 소망한다.

김겸섭

성경해석 연구 공동체인 아나톨레와 문학읽기 모임인 레노바레를 만들어 ‘성서와 문학 읽기’ 사역을 하고 있으며, 현재 서울 방화동 한마음교회를 섬기고 있다. 저서로 <천사는 오후 3시에 커피를 마신다> <사랑이 위독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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