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곡 박동완과 손자 박재상 박사 이야기

특집 : 앞으로, 앞으로

나라를 빼앗긴 엄혹한 시절, 그 시절에 희망은 있었을까. 그러나 그 시절 독립을 외치며 희망을 목 놓아 외쳤던 이들이 있다. 삼일절을 맞아 그들 중 한 사람이었던 근곡 박동완 독립운동가를 소환한다. 또한 그의 손자 박재상 박사의 이야기도 싣는다. 세월이 흘러도 그 둘의 삶 속에서 면면히 흐르는 도망가지 않고, 숨지 않고, 회피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자세를 되짚어본다. <편집자 주>

전진할 수 있었던 힘

한 소년이 있었다. 목회자가 되고 싶었던 그는 아버지께 자기의 꿈을 밝혔다. 그런데 아버지는 “내일부터 학교 가지 마라”고 말하실 정도로 강력하게 반대를 하셨다. 이유가 있었다. 자신이 목회자이자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태어나 너무나 가난하고 힘든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아들이 목회자가 되어 가난하게 살까 염려되어서였다.

아버지의 반대로 의대로 진학한 소년. 결국 정신과 의사가 되었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10년이 걸려 목회자 과정을 밟아 결국 목회자가 되었다. 정신과 의사로서만이 아니라 목회도 하게 된 것. 뿐만 아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독립운동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학문적으로 발굴, 정리하여 아내와 함께 각각 박사학위논문을 썼으며, 그로 인해 2019년도에는 한국인문사회과학상을 받기도 하였다. 이런 힘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편하게 살 수 있는 상황 속에서 아무리 어린 시절 가졌던 꿈이라고 해도 피곤한 삶 속에 매몰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박재상 박사와 할아버지

현재 국립법무병원 의료부장인 박재상 박사(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참빛침례교회 담임목사·사진)를 만나 그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열심히 산다고, 공부를 잘한다고 가능한 일은 아니기에.

“저희 할아버지이신 독립운동가 근곡 박동완 목사님 영향이 컸습니다. 3·1운동 때 독립선언문을 발표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시지요. 독립운동가셨으며, 기독교 언론인이셨고, 교육목회자셨어요.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신앙과 삶의 자세를 견지하다 보니 저도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 같습니다.”

어려서부터 띄엄띄엄 들은 할아버지. 3·1독립운동 당시 민족대표 가운데 16명의 기독교인 중 한 명으로, 신간회 창립 및 초창기 운영에 중추적 역할을 하셨던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박재상 박사에게는 꿈이 생겼다고 말했다.

“세 가지 꿈이 있었는데, 첫 번째는 할아버지의 유품인 성경을 가지는 것이며, 두 번째 꿈은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되는 것, 그리고 세 번째 꿈은 할아버지의 발자취를 밝히는 것이었어요. 중학교 1학년 때 미국 드라마 <뿌리>를 보고 난 뒤 가진 꿈이었지요. 어린 시절 작은아버지 댁에 놀러가서, 해방 전 하와이로 망명가서 돌아가셨기에 한 번도 만나 뵌 적 없는 할아버지가 3․1독립운동으로 인해 수감되어 감옥에서 보셨다던 일본어로 된 신약성경을 우연히 보게 되었고, 그것을 가지고 싶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사촌 형으로부터 할아버지 유품인 성경과 가방을 받게 되었고, 꿈을 가진 지 30여 년이 지나서 목사 안수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꿈을 꾼 지 40여 년이 흐른 후 마지막 꿈인 할아버지에 대해 밝히는 것을 아내인 임미선 박사의 박사학위논문 ‘민족대표 근곡 박동완의 생애와 기독교 민족운동 연구’와 자신의 ‘민족대표 근곡 박동완의 기독교 민주주의 연구’ 박사학위논문으로 열매 맺게 된 것. 논문을 준비하며 연세대학교 국학자료실, 국사편찬위원회 등을 이 잡듯 뒤졌다. 마치 숨겨진 보물찾기처럼 자료를 발견할 때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에 대해서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할아버지가 남긴 글들을 보며 가슴이 뜨거워졌고, 본래 가졌던 자신의 생각이나 신앙과 너무 잘 맞는 것이 놀라웠다.

“무려 100여 년 전에 쓰인 조부의 글을 연구하는 동안 시대를 초월하여 그분과 대화하고 깊은 교감을 하였습니다. 연구 내내 살아계신 조부로부터 직접 지도를 받는 듯한 경이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

그가 자료를 통해 만난 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을까. 독립을 외치다 잡혀 고문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갇혀있어도 할아버지는 당당했다. 1919년 3월 13일 서대문감옥에서 검사에 의해 행해진 심문 기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질문 : 피고가 이번 조선독립운동을 하게 된 전말을 자세히 말하라.

박동완 : 올 2월 20일경 기독교신보사인 내 사무소에 박희도가 와서, 나는 조선도 민족 자결에 의해 독립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박희도도 찬성했다. 그 후 2월 27일 다시 박희도가 왔길래, 나는 누구든지 독립운동을 한다면 찬성하니 참여하게 해달라고 의뢰했다.

3월 18일에도 역시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절박한 상황 가운데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밝힌다.

검사 : 피고는 조선독립이 꼭 될 줄로 생각하는가.

박동완 : 그렇다. 일본과 열국이 허락할 줄로 생각하고 있다.

검사 : 금후도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박동완 : 물론 그렇다.

“할아버지는 먼저 자발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겠다고 표하시면서 합류하신 것입니다. 평소 지론이신 ‘사(思)하였으면, 언(言)하여 표(表)하라, 조선 그리스도인이여’를 목숨 걸고 실행에 옮기신 것이지요. 그리고 그런 근저에는 절망이 아닌 희망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 희망은 박동완 목사가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쓴 시에 온전히 녹아 있다.

살을 에이고 저미는 듯한 율렬(: 차갑고 세찬, 매서운)하던 겨울바람도 이제는 부드럽고 온화한 봄바람이 불어온다…동칩(冬蟄)하였던 개구리 소리 지르고 보금자리에 숨었던 종달새 노래 부르며 중천에 높이 떠 펄펄 나른다. 아침 군생만물이 다 기뻐하는 희망의 때가 돌아온다. 인생인들 슬픔에서 기쁨에, 고통에서 쾌락에, 눌림에서 자유에 기쁜 때가 이르지 아니할까 보냐.

“아무리 시대가 어렵고 힘들고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좋은 때가 반드시 도래한다는 믿음이 배어 있으며, 일제에 의해 강점되어 생긴 슬픔과 고통, 눌림에서 벗어나 기쁨과 희망의 때가 반드시 돌아온다고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라고 확신하신 것이지요, 마치 겨울과 같은 일제가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따라 봄이 도래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박동완 목사는 1941년 2월 23일 이역만리 타향 하와이에서 쓸쓸히 조국의 광복을 4년 앞둔 채 운명했다. 이후 그의 유해는 1941년 4월 고국으로 돌아와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고인에게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으며, 이후 1966년 5월 18일 묘소는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 하단 23번에 이장됐다.

3·1운동 이후로 한복을 입을 때면 바지에 대님을 매지 않았다고 한다. 조국이 독립되기 전에는 대님을 매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또 평소 시계를 항상 30분을 늦춰 놓았다. 일제가 정한 표준시각에 맞춰 살지 않겠다는 신념의 표시로, 비타협적 자세로 외길을 걸은 그리스도인, 언론인, 독립운동가였다.

 

자기 삶을 돌아보다

자신 역시도 인생을 돌아보니 자기도 모르게 ‘사(思)하였으면, 언(言)하여 표(表)하라’는 할아버지 평소 지론처럼 살아왔던 것. 어렸을 때는 유복하게 자랐으나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하루아침에 가정이 어려워졌고, 부친의 반대로 원래 꿈을 바로 이룰 수 없어도, 뿌리 찾기가 가능할지 아득해보여도, 뜻을 세우고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간 것이다. 믿음과 생각과 말과 삶이 괴리되지 않았던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정신적 유산이 자신의 힘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교회목회 뿐 아니라 정신과 의사로 현재 근무하고 있는 국립법무병원은 치료감호법에 의하여 치료감호처분을 받은 자의 수용·감호와 치료를 하는 곳입니다. 범죄를 저지른 환자들, 다른 이들 눈에는 강도로만 보이겠지만 제 눈에는 강도 맞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 땅에서 강도 맞은 사람들을 돕고 치료하길 원합니다. 의사로, 목사로, 교수로 사는 것이 다 연결된 한 가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할아버지의 삶을 역 추적하며, 또한 자신의 삶을 살아가며 깨닫게 되는 것은 “한 시간 한 시간이 소중하다. 나에게 주어진 하루를 예수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것은 ‘순간’밖에 없습니다. 그 순간의 삶을 천국의 삶으로 살 수 있을 때 순간이 영원의 삶으로 맞닿을 수 있는 것이지요. 할아버지는 그것을 아셨던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앞으로도 계속 그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겠습니다.”

‘박동완은 이처럼 세상의 모든 비관적 상황들을 예수를 믿고 의지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식민지 상태에서 낙망에 빠진 민중에게 희망을 줌으로써 항일정신을 고취시키고 이것을 다시 기독교 정신으로 승화시켰다. 식민지 조선의 땅을 밟고 살았지만 그의 눈은 영원한 천국을 언제나 바라보았다. 따라서 그는 절망적 상황에서도 늘 희망에 넘치는 현실적 낙관주의에 서 있다. 그는 십자가라는 비탄을 언제나 개선이라는 기쁨으로 바라본 것이다.’

- <근곡 박동완의 생애와 기독교 민주주의 연구> 중에서

지금 어렵지만, ‘너머’의 것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타협하지 않고, 절망에 짓눌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사진 설명 : 근곡 박동완 목사와 국립현충원 묘비, 박동완 목사의 가방과 신약성경, 박 목사가 시무한 하와이 아히아와교회

공주=이경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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