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선생님, 우리 선생님

우리 인생에 결코 가볍지 않은 이름과 자리를 차지하는 ‘선생님’,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선한 영향을 주신 분들, 우리의 그분들을 오늘로 소환한다.

<선생님 기도를 잊지 못해요>

고 2때 학교 친구를 따라 우연히 교회에 가게 되었다. 반 배정을 받고 선생님과 인사를 나눴는데, 선생님은 환한 미소로 반갑게 맞아주셨다. 일주일에 한 번, 예배 후 잠시 만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선생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진심이셨다. 철없는 우리들의 넋두리와 재미없는 농담에도 언제나 함박웃음으로 반응해 주셨다.

우리와의 짧은 만남을 위해 그분은 어떤 시간을 보내셨을까? 아마도 많은 기도와 고민이 있으셨을 거다. 한번은 노트를 한 권씩 나눠주시면서 글이나 그림으로 친구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써보자고 하셨다. 롤링페이퍼와 비슷한 형식이었는데, 참 좋았다. 그리기를 좋아했기에 친구와 선생님의 노트에 그림을 그려서 마음을 전하곤 했다.

어느 날은 집으로 초대해주셨다. 철없는 우리는 내 집에 온 것 마냥 웃고 떠들었고, 선생님은 언제나 기쁘게 집을 오픈해주셨다. 그곳은 우리의 놀이터이자 상담소였다. 친구나 부모님에게 하기 어려웠던 고민들을 털어놓으면 선생님은 언제나 경청해주셨다. “그래그래…” 말씀하시며 토닥토닥 어깨를 두드려주시고 고개를 끄덕여주시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었다.

처음으로 여름수련회에 갔을 때, 기도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어색하게 눈만 감고 있던 내 등에 선생님의 따뜻한 손이 닿았다. 선생님은 마음을 다해 기도해주셨다. 그때의 그 기도소리가 30여 년이 넘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선생님의 그 기도가 지금까지 나를 신앙 안에서 살아가게 한 밑거름이 아니었을까?

지금은 연세 많은 권사님이 되셨지만, 여전히 소녀 같은 선생님. 때로는 친구, 엄마 같은 우리 선생님,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선생님의 제자였던 것에 감사하고, 행복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 김은수, 경기도 화성

<나를 위해 용기 내어주신 선생님>

고등학생 시절, 한참 예민하고 입시 스트레스로 힘들어하던 그 때에 사랑과 인내로 품어주신 따뜻한 선생님이 계셨다. 선생님은 학교에서 모범생이든,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이든 똑같이 대해주시는 분이셨다.

고2 여름 수련회. 둘째 날 프로그램 중에 물놀이를 하다가 귀를 다쳤다. 저녁쯤 귀에 통증이 오더니 급기야 피가 흘렀다. 모두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선생님은 나를 안심시키고 병원에 데려다 주셨다. 비가 와서 유난히도 어두웠던 밤. 시골이라 택시도 없었기에 한참을 산길을 걸어 마을로 내려갔다. 아픈 귀를 부여잡고 산길을 걸었는지 뛰었는지도 모르게 오래도록 걷는 동안 선생님도 함께 아파하고 있었다. 나뭇가지, 풀잎에 쓸려 선생님 다리에도 피가 났다. 이윽고 병원에 도착했고, 선생님은 끝까지 나를 안심시키셨다. 나중에 말씀하시기를 선생님도 그때 엄청 무서우셨다고…. 그러나 사랑하는 제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씩씩한 척 용기를 내셨던 거다.

그때 나이가 30대 초반이셨던 선생님. 열여덟 소녀에게 선생님은 마치 우주와 같이 넓고 커다란 분이었다. 그래서 한껏 의지할 수 있었다.

이제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때의 선생님보다 더 나이를 먹고 나니 선생님 생각이 더 간절해진다. 스승과 제자에서 30년 지기 신앙의 동지로, 서로 무르익어가는 모습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다. 이제 교회에서는 권사님이시지만, 나에게는 영원한 고등부 선생님이시다.

- 편경연, 서울 송파구

<진짜 멋진 우리 선생님>

6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갔다. 낯선 도시, 낯선 학교, 깍쟁이 같을 것만 같은 서울 아이들. 잔뜩 긴장을 하고 교무실에서 반 배정을 받아 교실로 향했다.

문이 드르륵 열리며 담임선생님이 나오시는데 ‘아뿔싸! 난 이제 죽었다.’ 싶을 정도로 키가 크고, 검은색 투피스에, 커다란 귀걸이, 짧게 자른 커트에 무스로 반듯하게 세운 머리, 키메라(팝페라 가수) 같은 화려한 눈 화장에 카리스마 있는 여장군 같은 선생님이었다. 외모처럼 선생님의 목소리도 카리스마가 있었다.

하지만 첫인상이 나의 오해였다는 사실을 알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른 반들과 다르게 선생님과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는 시간이 많았고, 의견을 듣고 수렴해 주시는 회의도 자주 했다. 또 자유롭고, 미술을 좋아하시고 예술적 감각이 뛰어나신 선생님의 성향에 우리는 시화전도 자주 열었고, 음악 책에 있는 노래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외국 번안곡이나 건전 가요 같이 좋은 노래들도 알려주셔서 함께 불렀다. 다른 반들이 딱딱한 교실에 앉아 미술 수업을 할 때 우리 반은 운동장에 나가 자연을 보고 그림을 그리거나 흰옷을 가져와 염색도 하는 등 재미있고 소중했던 추억들이 참 많다.

그 뒤로도 선생님과는 일 년에 한 번씩 만났고, 사춘기 때나 직장 생활을 할 때에도 전화로 고민을 상담하곤 했다. 그렇게 사제지간이 아닌 모녀나 친구처럼 지냈다. 또 결혼식 때 선생님은 편지를 정성껏 써오셔서 낭독해 주시며 축사를 해주셨고, 선생님 아들 결혼식에는 내가 누나의 자격으로 함께 했다. 이렇게 삶의 중요한 순간을 함께 하는 선생님과 제자 사이가 또 어디 있을까. 오늘은 육아한답시고, 코로나라고 못 찾아뵙고, 자주 연락 못 드린 못난 제자의 모습을 버리고 살가운 딸로서 전화 한 번 드려야겠다.

- 신혜원, 경기도 파주

<나의 주일학교 선생님>

마음의 창고에 고스란히 쌓여있는 그리움. 그 창고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고 계신 잊지 못할 선생님이 기억난다. 경남 밀양 시골 동네에서 가장 가난한 총각에게 시집온 새댁. 예수 믿는 청년이라는 것 하나만 보고 낯선 곳에 온 새댁은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낳은 후 20대 초반에 혼자가 되었다.

새댁은 마을을 떠나지 않고 동네를 지키며 시댁 식구들과 함께 살았다. 그분이 내 어린 시절 주일학교 선생님이시다. 지금 돌이켜보면 몹시도 고된 삶이었을 텐데, 우리들과 함께 할 때면 언제나 천사 같았던 선생님. 선생님이 들려주신 요셉, 다윗, 예수님 이야기가 엊그제 들은 것처럼 생생하다.

밀양을 떠난 지 40년이 훌쩍 지났지만, 힘든 삶을 견뎌내며 주일학교 어린이들을 위해 봉사하신 선생님의 삶과 신앙은 내 평생의 자양분이 되었다.

문득 선생님이 보고 싶다. 내 나이도 칠순을 바라보니 선생님은 팔순을 훌쩍 넘기셨겠지? 그런데 어쩐 일인가! 이번 설날에 목사가 된 선생님의 아드님이 어머니를 모시고 우리 집으로 오겠다고 연락을 해오셨다. 나의 주일학교 선생님, 이영자 권사님! 그 시절 새댁을 만날 생각에 설렌다.

- 김혜옥, 경기도 양평

<선생님의 올곧음을 기억합니다>

철학적인 고민, 옳고 그름과 정의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 청소년기. 1989년에 만난 중1 담임선생님이 생각난다.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우리 학교에 부임하셨는데, 수수한 모습이, 올곧게 살아가기를 가르쳐주셨던 모습이 사춘기를 시작한 나에게는 크게 보였다.

그런데 1학기 수업을 마치고 여름방학식 날 우리 반 전체가 울음바다가 됐다. 방학이 지나면 교실에서 보지 못할 수 있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전교조 활동 지지자가 교육감이 되기도 하는 시대이지만, 그 당시의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고, 그 일로 담임선생님을 못 뵙게 되었다. 선생님은 무엇을 지켜내기 위해 그러셨을까? 그분의 신념과 믿음, 그리고 뜻이 궁금했지만 여쭙지 못하고 헤어졌다.

시간이 흘러 사회에 첫 발을 내딛게 되면서 선생님 안부가 궁금했다. 교육청 사이트에 가면 선생님을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성함을 교육청 누리집에 입력해 보았다. 서울 강서구에 있는 한 학교에 근무하고 계심을 확인하고 십년 동안 갖고 있었던 걱정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정의로워야 한다’고 가르쳐주셨던 선생님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이제 중년이 된 나도 누군가를 가르치고 영향을 주는 자리에 있다. 뜻을 위해 꼿꼿하게 당신의 자리에 계셨던 그 모습을 오늘 나에게도 대입해본다.

- 이지인, 서울 서초구

정리 = 민대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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