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과거를 잊지 않기

특집 : 시간여행자로 산다는 것

영화의 특질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움직이는 영상’이란 겁니다. 움직인다는 건 바로 시간의 흐름을 담고 있다는 거죠. 그래서 철학자와 비평가들은 흔히 영화를 곧 ‘시간 이미지’라고 규정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는 그 시간을 갖고 한껏 장난을 칩니다. 편집을 통해 시간을 생략하기도, 거꾸로 확장하기도 해요.

게다가 장르에 따라 그 시간의 활용법이 전혀 달라요. 특히 멜로드라마는 천천히 사람의 감정을 축적하는 만큼, 작품을 통해 표현되는 ‘시간성’이 다른 장르에 비해 훨씬 뚜렷해요. 액션 영화는 압축적이고 빠른 데 반해, 공포와 재난 영화는 대개 한 박자 빨리 전개되고 멜로드라마는 늘 너무 늦게(too late) 드러납니다. 느림과 늦음의 미학이라고나 할까요? 이렇듯 주제나 소재 측면이 아니라, 시간의 표현 형식만을 갖고도 장르의 특질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화 관람은 곧 시간의 체험인 셈이에요. 영화가 시간을 갖고 노는 동안, 관객은 두세 시간의 짧은 감상을 통해 그 시간 이상의 엄청나게 긴 이야기를 전달받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과거를 확인하고, 현재를 살펴보며, 미래를 체험합니다.

지난 10여 년간, 대한민국 문화계 최고 인기 콘텐츠는 지나간 시간, 즉 ‘과거’였습니다. 일종의 신드롬처럼 TV 안방극장을 강타한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는 잊혀졌던 1980~90년대 향수를 자극해 인기를 얻었습니다. 게다가 시청자로 하여금 등장인물 중 누가 누구와 짝을 이룰까(아니 이뤘을까)를 궁금케 만들며, 현재를 파악하기 위해 과거를 확인해나가는 이야기 전개로 드라마 시청 행위를 마치 게임과 같은 오락으로 진화시켰습니다.

그 사이 영화계 또한 ‘과거’에 지속적으로 매달려 왔어요. 노무현 대통령 젊은 시절 이야기인 <변호인>, 근대사 격변기 아버지 세대를 그린 <국제시장>, 이순신 전기 영화 <명량>, 독립군의 무장투쟁을 극화한 <암살>, 살아온 인생을 되짚어 보는 판타지 <신과 함께> 시리즈, 그리고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택시운전사> 등, 이 모두 지난 10년간 관객 천만을 넘은 영화들입니다. 흥행성이 없다는 이유로 그동안 영화계에서 외면 받아왔던 일제강점기 배경의 영화들 또한 쏟아졌지요. <밀정>·<동주>·<귀향>·<덕혜옹주>·<박열>·<아가씨> 등등. 그뿐만 아니라 4년 전 TV로 방영되면서 큰 화제를 일으켰던 <미스터 션샤인> 또한 일제강점기와 밀접하게 관련된 작품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아직 정리하지 못한 과거를 계속 환기해왔습니다.

그런데, 왜 유독 ‘과거’일까요? ‘지금’에 대한 불안이 자꾸 ‘과거’를 향해 시선을 돌리게 만든 건 아닐까요? 즉, 현재의 결핍을 메우려 과거를 들여다보기 시작하는 거죠. 그 결핍을 채우는 양상은 다양하게 작동합니다. 우선, 힘든 현 상황에서 찾을 수 없는 희망을 과거에서 찾고자 하는 겁니다. 이 경우 으레 과거를 낭만적으로 묘사하며 이른바 ‘추억팔이’를 시도합니다.

또는, 불안정한 현실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과거를 살펴보기도 합니다. <명량>은 우리한테도 이런 기적이 있었다며 국가주의적 감정을 고조시키고, <국제시장>은 국가 건설을 위해 우리가 이만큼 고생했다고 외치고, <변호인>이나 <택시운전사>, 그리고 최근에 나온 <남산의 부장들>이나 <헌트>같은 작품은 과거에 우리가 이런 잘못을 저질렀다고 지적합니다.

이 와중에 최근 문화계에선 ‘회빙환’이라는 키워드가 주목받고 있습니다. 현재의 기억을 유지한 채 과거로 되돌아가는 ‘회귀’, 자신의 기억을 유지한 채로 다른 인물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빙의’, 지금까지의 모든 기억을 갖고 별개의 인물로 다시 태어나는 ‘환생’, 이 회귀·빙의·환생의 줄임말인 ‘회빙환’은 웹툰과 웹소설의 성공 공식으로 자리 잡으면서 점차 드라마와 영화계로까지 확산되고 있어요. 지금 가장 주목받고 있는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를 한 번 봐보세요. 웹소설 원작을 드라마로 만든 이 작품은 ‘회빙환’물의 전형으로, 재벌가에서 머슴처럼 일하던 주인공이 죽게 된 후, 과거로 돌아가 그 재벌가의 아들로 환생해 복수와 함께 미스터리를 풀어나가는 걸 보여줍니다. 예전에 안방극장을 점령했던 <도깨비>를 비롯해, 영화화되어 큰 성공을 거둔 웹툰 원작의 <신과 함께> 시리즈 또한 모두 이 ‘회빙환’이 주요 플롯입니다.

그렇다면, 왜 ‘회빙환’인가에 대해 질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위적인 힘이 들어가지 않는 한 자연은 무조건 점점 더 복잡해진다는 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흐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시간을 역행해 현재에서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인생은 무조건 1회차입니다. 그러하기에 과거에 대해 미련을 갖는 건 인지상정이지요. 하지만 되돌릴 순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최근 몇 년간 ‘이생망’이란 말이 20~30대 사이에서 유행했습니다. “이번 생은 망했다”의 줄임말로, 불공정한 태생적 현실, 그리고 그릇된 선택에 따른 비참한 현실을 비관하는 자조 섞인 말입니다. 더불어 금수저니, 흙수저니 하는 말 역시 여전히 회자됩니다. 부모의 재력에 따라 자녀의 실력이 결정되는 상황이 굳어져 가니, 저런 말들이 유행할 수밖에 없는 게지요. 특히나 여전히 고등학교 3년 생활과 수능시험 한 번으로 인생이 거의 결정되는 대한민국 상황이, MZ세대로 하여금 인생을 더욱 도박처럼 받아들이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대중은 현실 도피처를 ‘회빙환’ 플롯에서 찾은 겁니다. 한마디로 문화 콘텐츠가 대중의 욕망을 욕망하면서, 현실에서 풀 수 없는 문제를 판타지 속에서 해결함으로써 대리 충족하게 만든 거지요. 그러함에도 우리 모두는 오늘 또 현실을 살아가야 합니다.

<노팅힐>과 <러브 액츄얼리> 등을 연출했던 로맨스 영화의 대가 리처드 커티스 감독의 작품으로, 시간 여행자를 다룬 <어바웃 타임>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지난 10년간 나온 로맨틱 코미디 작품 중 단연 으뜸인 이 작품 속에서, 주인공은 현재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과거로 돌아가 선택을 수정해나갑니다. 그런데 영화는 현실을 바꿀 기회라는 과거라는 공간이 사실은 회한과 추억의 공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과거는 우리를 만든 삶 전부라는 거지요. 과거를 수정해 현재를 잠시 바꿀 수는 있어도, 다가올 미래는 어쩔 수 없다는 걸 주인공이 자각하게 되면서, 어느 순간 미래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과거를 있는 그대로 남겨둡니다. 어떻게 살든, 과거는 과거 그 자체로 받아들여야 하고, 그 모든 걸 우리의, 우리에 의한, 우리를 위한 과거라고 강조해요. 따라서 과거에 사로잡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부정하기보다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 즉 오늘을 사는, 아니 더 나아가 오늘 최선을 다하는 삶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현실에 만족하라는 뻔한 말 같지만, 그 안에 진리가 담겨있는 법이지요. 이 말은 오직 현실에만 집착하라는 건 아닙니다. ‘카르페 디엠’엔 늘 대구(對句)로 따라붙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아모르 파티’(Amor Fati), 즉 “운명을 사랑하라”입니다. 비록 과거를 바꿀 순 없지만, 현실의 우리에게 과거가 소중한 이유는 우리가 그 모든 걸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린 다시 지난해를 살아갈 순 없습니다. 어떤 2023년 새해가 펼쳐질지 모르지만, 2022년을 잊지 않는 사람만이 과거를 딛고 새로운 날을 열 수 있을 겁니다. 잊는 순간 과거는 또 반복됩니다. 과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과거를 잊지 말아야 하는 거예요.

임택

단국대학교 초빙교수. 미국 오하이오대학교에서 영화이론을 공부했다. 대학에서 영화학과 미학을 강의하며, 철학과 인문학을 통해 영화를 독해하고, 시대와 소통하는 방법을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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