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의 ‘신곡’과 함께 빛을 따라가는 길

 

특집 : 시간여행자로 산다는 것

매 순간이 새로운 시간이지만 새해의 이름으로 펼쳐질 날들을 새롭게 조망해보는 1월에 셰익스피어, 괴테와 함께 유럽 문학의 거장으로 불리는 단테의 <신곡>을 펼친다. 거기엔 중세에 고뇌하며 앞섰던 깨달음이 지금의 삶뿐 아니라 그 너머도 비추는 ‘빛’이 있다고 하기에.

“인생길 반 고비에 길을 잃고 어두운 숲에 있었다.”

어디서 언제 맹수가 나올지 모르는 깊은 숲을 지나려니 두려움이 몰려온다.

그때 돕는 이가 찾아와 힘과 용기를 주는 말로 다가온다.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에서 연옥, 천국의 문 앞까지 단테를 인도하는 역할로 등장하는 베르길리우스.

인생길에 좋은 대화 상대를 만나는 일은 꿈같은 축복이다. 그것은 좋은 글과 책이기도 하고 지혜로운 대화 친구이기도 하며, 스스로 배우고 실천하는 자세다.

섬뜩한 공간을 느끼며

미지의 숲을 지나며 만난 큰 구덩이, 그 안은 깔때기 모양으로 되어 아래로 갈수록 비좁고 음울한 지옥이었다. 한탄과 불평, 탄식과 분노의 외침이 스며 나오는 소굴. 거기엔 탐욕과 분노에 휩쓸린 사람들과 고의로 죄를 지은 이들이 펄펄 끓는 거대한 피의 강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아, 내 안에 품은 공간 어디쯤에도 증오가 대접받고 야망의 아수라장인 소굴이 있다고 C.S 루이스가 말했었다. 다른 사람을 공격할 때 치솟는 쾌락은 진통제 역할을 한다고도 했다. 이것은 남 얘기를 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의 들보를 보라는 주의 말씀을 애써 외면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이 구덩이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등급이 있었는데, ‘무절제’의 죄를 지은 사람, 고의로 악을 계획한 ‘이중적 행위자’, ‘폭력’을 행사한 사람 순으로 죄가 무거웠다.

여기서 폭력성은, 사려 깊은 판단 능력을 차단하고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사람, 액션 영화나 게임에 빠지는 사람이 주의해야 할 성향이다. 또한 자신이 옳다는 데에 집착해 흑백 논리로 고집하며 남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폭력성을 가진 사람으로 분류된다.

동행하는 베르길리우스가 알려준다. 이런 모습들을 잘 보면서 질문하고 관찰하며 계속 나아가야 한다고. 그리고 몸에 배어있는 염려와 근심 걱정이 타당한 것인지, 불합리한 것이 아닌지도 생각해보라고 조언한다(욕심에서 온 것이 아닌지).

거짓말, 최악의 죄

단테가 묘사하는 지옥의 밑바닥은 얼음 호수다. 거기는 지구의 가장 안쪽으로 ‘최악의 죄인’이라 불리는 거짓말쟁이들이 모인 지옥의 가장 깊은 곳이다. 놀랍다. 거짓말이 최악의 죄라니! 모기가 ‘인간을 가장 많이 죽이는 생명체’인 것처럼 거짓말도 그런 존재임을 뜻하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삶의 흐름을 위해, 배려의 마음으로 하는 ‘하얀 거짓말’은?

작게 시작한 거짓말도 거미줄처럼 증식해 회색으로 변하기 쉽고, 내면에 붕괴를 일으키며, 스트레스를 가져옴은 다르지 않다고 한다. 과장이나 꾸밈을 유지하려 불안과 우울이 생기며 적대감이 솟기도 한다는 것. 작가 조지 오웰은 ‘더블 스피크’(doublespeak, 이중화법)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현실을 왜곡하고 모호하게 만드는 언어 사용 방식’이 거짓말의 의도라 말했다.

구덩이의 맨 밑에 있는 이 얼음 호수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진실을 드러내야 하는데, 자신을 열어 진실을 보기 위해서는 고통과 단절까지도 감수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신과 의사 스캇 펙이 <거짓의 사람들>에서 ‘자신을 속이고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 다른 사람을 무의식중에 희생양으로 삼는 사람, 강박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현실에 나타나는 거짓의 사람들의 양상’이라 한 것이 들어맞는다.

그는 여기서 근원적인 치료로 ‘사랑’을 말하며, 감추고 잊으려 했던 시절로의 퇴행을 통해서 ‘있는 모습대로 받아들여지는 경험’이 이중적 삶에서 멀어지는 방법이라 말한다. 스스로 공부하며 또는 상담사와 가족 가운데에서 퇴행과 회복의 시간을 가지면, 자기 뜻을 거스르는 시련에 강박적이거나 비겁하게 대응하지 않고 담담히 견뎌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중력을 거스르는 오솔길

단테는 얼음 호수 수면 아래 ‘끝’이라고 생각한 곳에서 깨끗한 오솔길을 만난다. 중력을 거슬러 올라가는 그 길에서 구멍으로 하늘에 있는 아름다운 것들을 볼 수 있었다. 빛, 별들이 보이는 평온함은 자신에게 솔직해질 때 찾아온 바로 그 느낌이었다.

살아오며 핵심 가치에서 벗어나 사람을 바라볼 때 가졌던 ‘부정적 판단, 도덕적 분노’에 대해 지겨움이 느껴지면서, 누군가를 꼬집는 것이 종종 주요 기능이었음을 깨닫는다.

위에는 가파른 돌투성이 산들이 솟아있었다.

단테는 헐떡거리면서 ‘날아야 한다. 빠른 날개로~’ 라며 자유와 기쁨, 평화를 갈망했다. 내면과 조화된 발걸음이 거친 산을 오르게 하고 있었다. 무례한 농담에 웃지 않기, 혼자 서는 길을 연습하고 있는 것이었다. 달라진 삶을 살려 할 때 별생각 없이 수다 떨던 시간과 불평을 막 주고받던 모습이 그리울 수 있다. 앞으로 가야 하는데 살던 모습으로 되돌아가기 쉬운 이유가 그것이다. 과장과 왜곡, 일방적 주장, 습관을 갑자기 버리려 하니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생경한 분위기를 느끼게 해 적응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단테는 여기서 ‘자유 의지’를 깨달으며 온전한 길로 계속 나아가기로 한다.

온전함으로 가는 길

나를 화나게 했던 공격자가 나를 온전함으로 가는 다음 단계를 보여주는 사람이라 여기게 되는 때, 공격당하면서도 비난이나 방어보다 자신의 ‘창의적인 대응’에 집중할 수 있는 때를 맞이하게 되면 고통으로 더 이상 시간을 소비하지 않게 된다. 그렇다. 시간이 얼마 없다. 고통스러워하며 낭비할 시간이 없다.

창의적인 대응이 무엇일까. 자신에게 의미를 주고 기쁨을 주는 것, 어디에도 해롭지 않고 오히려 유익을 주는 것을 찾아야 한다.

여기서 단테는 첫사랑 베아트리체를 만난다. 일찍 세상을 떠난 그녀는 ‘너를 도우려고 늘 지켜보았어.’라 말하며, 맑은 강에 몸을 담가 두려움과 수치심을 씻어버리고 잃어버린 순수를 찾으라고 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했던 아름다운 기억도 짚어보면서 말이다. 그래도 되는구나! 그리고 별을 향해 올라갈 준비를 하라고 한다.

어쩌면 이러한 여정이 반복되겠지만 이런 길, 이런 위안을 다른 사람에게도 알려주며 함께 온전함을 향해 가자고 전하라는 거다.

운동경기에서 전반전에 잘 뛰었다고 후반전을 대충할 수 없듯이, 인생의 여정도 마지막까지 계속 잘 걸어가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하나 보다.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예레미야 5장 1절)

전영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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