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를 읽게 되다

오래전에 쓴 일기를 다시 보는 기분은 어떨까?

아버지가 쓰신 일기장이 우리 세대가 지나면 쓰레기로 사라질 것이기에 중요한 부분들을 정리해놓겠다는 의도로 시작된 작업이, 평생 쓴 내 일기와 아내의 일기에까지 옮겨 붙었다. 대부분 일기는 써놓고 다시 읽어보지 않은 것들인데, 이제 보니 이런 일이 있었나 기억나지 않는 사실들이 많았고,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과 일기에 쓴 것보다 더 또렷하게 기억하는 것도 있었다.

아버지의 일기, 아내의 일기

아버지의 일기는 한자(漢字)가 많고, 그것도 약자나 흘려쓰기로 되어있어 읽기에 애를 먹었다. 다음 세대로 넘어가면 거의 해독이 불가능할 것 같았다. 아버지 일기에서 보고 싶지 않은 내용들이 적지 않게 있었으나, 인간의 삶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점에서,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셔서 허락을 받지 못했지만 일부를 옮겼다. 그 세대는 아직 세상이 느리게 변하는 시대여서, 옛 전통과 관습, 언어, 문화가 남아있는 마지막 세대였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부모님 세대가 쓰시던 언어를 그대로 옮겨놓고 괄호 안에 설명어를 기재하려 했다.

어떤 부분은 나와 부모, 가족의 부끄러운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어서 망설였으나, 드러내기로 했다. 세상과 가족의 분화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아내가 쓴 일기는 보는 이를 따뜻하게 했다. 그런 면에서 특별한 기예가 보였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그렇게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간여행.’ 과거로 돌아가서 그 속을 돌아다니는 것은 인생 전체를 반추하는 과정이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간 느낌이었다. 수많은 생각들이 지나갔다.

기억의 창고에 먼지 쌓여있던 실체들이 또렷이 혹은 희미하게 떠올랐고, 어떤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나지 않는, 일기에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면 내 역사에서는 있지 않았다고 해야 할 일들도 꽤 많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록은 위대하면서도 무서운 것이다.

또한 아들이 실패를 거듭하고 불성실해 마음에 들지 않으셨을 텐데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도와주셨던 부모님께 너무 죄송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일어났다.

‘이렇게까지 해 주셨구나. 그 긴 시간 얼마나 마음고생 하셨을까?’

‘부모님 노년에 그 정도라도 해드려서 그나마 다행이다.’

장면 장면을 볼 때마다 이런 생각들이 지나갔다.

살아온 시간은 방황이라고 표현하기도 사치스러울 정도다. 너무, 너무, 너무 부끄러운 시간들이었다. 이번에 일기를 읽으면서 나란 인간의 깊숙한 모습을 보게 되었다.

지금, 사과하다

젊은 시절 내가 너무 방탕했고, 낭비했고, 무절제했고, 아내를 너무 힘들게 했고, 불성실했고, 무책임하고, 비겁하고, 배반했던 사실을 발견했다. 내가 이랬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 때 양쪽 친척이 소개한 펜팔로 시작해서 우여곡절을 겪으며 평생을 살고 있는 아내에게, 내게 벽 같은 사람이라고 자기를 품어주질 않는다고 말해온 아내에게, 이번 시간여행 중 너무너무 미안해서 몇 번이고 사죄를 했다.

“너무 미안하다, 내가 너무 어렸고, 물정 몰랐고, 바보 같았고 비겁했다. 사법시험 공부한다는 핑계로 함부로 했고 나 중심으로만 살았다는 걸 이제 알았다. 지금 보니 당신 고통이 너무 컸겠다. 난 평생 그걸 모르고 살아왔다.”고 사죄했다. 일기를 보지 않았다면 왜 아내가 지금도 그때 일로 힘들어 하는지, 그때의 트라우마가 아직도 그를 괴롭히고 있는지를 몰랐을 거다.

시간 속에서 그분을 만나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20대 때, 내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았을 때, 훌훌 털어버리고 명경지수(明鏡止水)에서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살았으면 됐을 텐데, 10년 동안 그 속에 갇혀 꼼짝달싹 못하고 그 안에서 뱅뱅 돌며 시간을 지나가게 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한 달이면 갈 수 있는 가나안 땅을 40년 동안 헤매고 있었던 장면이 연상된다. 내가 그랬구나.

그 절박함, 어려움, 실패, 좌절, 제자리 쳇바퀴 돌 듯, 미로 속을 헤매듯 방황하던, 앞이 하나도 안 보이는 흑암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긴 시간들.

그리고 거기서 벗어나게 되었던 그 때! 아직도 또렷하다. 앞이 하나도 안 보일 때, 하나님이 빛으로 날 찾아오셨다. 나에겐 세상이 뒤바뀐 사건이었다. 그 후로부터 40년의 일기 내용은 확 달라져 있었다. 많은 내용들이 신앙의 발자취이고, 하나님 앞에서의 내 모습인 것을 발견하게 된다. 시간여행 속에서 함께 하셨던 그분을 만난다.

<가족일기>

1. 김정삼 변호사의 일기 

1969. 9. 12. (고등학교 때 3선개헌 반대 내용 일부)

학교서의 일이다. 첫 시간이 끝나자 반장이 모두 운동장에 집합하란다. 성토대회를 하려는 기조였다. (중략) 평소에는 그렇게 사분오열하던 경기고등학교의 정신이 너무 기이하게도 일심부동(一心不動)이었다니, 전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 애국심만은 깊이 가슴 저변에 불타고 있었는지 모른다. 담임 이창옥 선생님의 ‘자주’정신이 모르는 사이에 우리 가슴에 파고든 것 같다.

2. 아버지의 일기

1996. 1. 2.

오늘은 조모님 68회 기일이다. 당시 광경을 회고하면 슬픈 눈물을 금할 수 없다.

조모님께서는 6년 연하이신 조부님과 결혼하신 후 불과 수년 후 조부님을 17세의 소년으로 하세(下世)하시고 23세의 청상과부로 68세까지 한 평생 고적(孤寂)하게 보내신 가련한 분이었다.

손자인 내가 막 돌을 경과한 강보에 쌓인 아기(襁褓乳兒)로 실모했을 때 조모님은 나를 품안에 품으시고 동냥 젖을 얻어 먹이면서 같이 울고 같이 웃고 하신 나의 거룩한 분이시다. 어느덧 내 나이 80이 되었다. 회고하니 참 오래 산 셈이다.

3. 아내의 일기

1994. 9. 12. (큰아이를 외국에 유학 보내놓은 상황)

“엄마 보고 싶어.” 하면서 전화한 아이의 목소리에서 치마 소매를 붙들고 다니던 아이의 모습이 생각난다. 그 어려웠던 나날들. 입시다, 대학이다 그 난리들 속에 난 그 때 모습들을 잊어버리고 살아왔다. 무엇이 최선인가? 앞만 보고 달려온 나날이다. 마치 경주마같이.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내 가슴속에 남아있는 아이의 어릴 적 모습, 자라온 모습이 한꺼번에 벅차게 나의 눈시울을 붉힌다. 단지 해방시켜 주고 싶었던 욕구, 참을 수 없는 분노, 그런 게 있었지….

사랑하는 나의 아이, 그 조그마한 내 아이의 모습이 오늘 종일 나를 붙든다. 이젠 얼마든지 홀로 설 수 있을 것 같았던 내 생각이 허물어진다.

그러나 언제까지 붙들고 있을 수만 없지 않은가!

홀로 설 수 있는 기회를 주자.

외로울 수 있는 기회를 주자.

그 고통 속에서 자기를, 자아를 발견할 기회를 주자. 그것이 나의 최선이리라.

김정삼

법조인으로서 이웃의 아픔에 눈을 두는 그리스도인. 교회와 사회와 국가의 바름과 옳음을 생각하며, 윤리 환경 봉사 관련 NGO에서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다. 법무법인 치악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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