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듣기

“많이 듣는 것이 많이 말하는 것이다”

“이 시대 사람들은 말은 잘하는데 대화는 서툴다”

카산드라의 비극 ? “듣지 않는 시대”

고대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의하면, 트로이의 마지막 왕 프리아모스 왕과 헤카베의 딸인 카산드라는 아폴론으로부터 자신을 사랑하는 조건으로 예언의 능력을 받게 된다. 그러나 카산드라는 예언의 능력만 받고 아폴론의 사랑을 거부한다. 분노한 아폴론은 “카산드라의 예언을 이후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라는 저주를 내린다. 이후 10년간에 걸친 트로이 전쟁의 마지막 해 그리스연합군은 오디세우스의 전략에 따라 목마를 트로이 성 앞에 놓고 퇴각을 하고, 트로이 사람들은 목마를 전리품으로 여겨 성안으로 옮기려 한다. 카산드라는 목마가 가져올 비극을 예언하며 반대하지만 제사장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카산드라의 예언에 “귀를 닫아” 버린다. 그 결과 그날 밤 트로이는 멸망한다.

마치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되심을 선포하는 스데반의 설교가 불쾌하여 “귀를 막고”(사도행전 7장 57절) 돌을 던져 살해했던 유대인들의 표정이 스친다. 이 시대는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경청하는 태도보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독백의 시대’이다. 그 결과 ‘대화’는 사라지고 ‘소통’은 단절됐다.

호모 엠파티쿠스

사회학에서는 바람직한 인간의 조건을 ‘호모 엠파티쿠스(homo empathicus, 공감하는 인간)’라고 규정한다. 곧 타인의 기쁨과 슬픔에 공감할 줄 아는 ‘사회적 뇌(腦)’를 지닌 사람이 선한 영향력이 높다는 것이다.

‘호모 엠파티쿠스’는 ‘들어주기’로 시작된다. ‘들어주기’보다 사람을 깊게 이해하는 수단은 아직 없다. 또한 ‘들어주기’를 통해 사람과의 거리는 가까워지고 전에 없던 친밀감이 생성된다. 사실 ‘들어주기’는 청각의 영역이 아니라 관심의 영역이다. 곧 관심이 없으면 자신의 청각에 문제가 없어도 그 말이 들리지 않는다. 호모 엠파티쿠스와 대척점에 있는 것이 ‘칵테일 효과’라는 개념이다. ‘칵테일 효과’란 “칵테일바에서는 여러 소리가 난무하지만 사람들의 귀에는 오직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들리는 현상”을 말한다. 이 시대가 유독 타인의 글과 말을 오해하고 곡해하는 현상이 현저하게 발생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문맹이란 글을 읽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것이다”

소녀 ‘모모’가 특별했던 까닭

작가 미하엘 엔데의 <모모>(1973)는 ‘부지런함’이 아닌 ‘분주함’으로 지쳐가는 인간의 비극을 서술한 판타지 소설이다. 이 소설 속에서 발견되는 인간의 모습은 시간이라는 숫자에 쫓겨 창가에 핀 장미꽃의 아름다움을 차근히 감상하지 못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소녀 모모는 시간을 앗아가는 회색신사들과 그들을 뒤에서 조종하는 호라 박사와 ‘시간’을 다시 찾아오기 위한 일전(一戰)을 벌여 결국 시간을 되찾아온다. 어린 소녀 모모가 사람들을 설득하여 ‘시간 찾아오기’라는 싸움을 가능하게 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모모의 힘은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힘”이었다. 모모는 삶에 지친 사람들의 탄식, 아픔, 안타까운 호소를 고요한 표정으로 끝까지 ‘경청’하는 태도로 사람들을 대했다. 모모의 ‘들어주기‘는 사람들을 위로했고, 위로받은 사람들은 모모를 깊게 신뢰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현명한 사람은 혀는 짧고 귀는 길다”라는 유대랍비 힐렐의 가르침은 진실이다.

‘해어화(解語花)’를 보았는지?

옛글에 ‘해어화(解語花)’라는 낱말이 있다. 곧 “사람의 말을 이해하는 꽃”이라는 뜻이다. 그런 꽃이 있었던가? 사실 꽃이 사람의 말을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과거에는 여성들이 글을 배우는 것을 엄격히 금했다. 그럼에도 일부 여인들은 문예를 익혔다. 그 여인들은 고대 그리스의 고급 기녀 ‘헤타이라(hetaira)’처럼 높은 지위의 사대부들과 글과 음악과 그림에 대해 심도 있는 대화가 가능했다. 여인들을 낮게 보던 사대부들은 이런 여인들의 학문에 놀라서 그들을 ‘해어화’라고 불렀다.

맞다.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해어화’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해어화’로 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첫째 - 편견, 선입견 걷어내기

누가는 교회와 복음을 대적하던 청년 사울이 다마스커스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졌다고 증언한다(사도행전 9장 18절). 사람과 사물을 밝히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편견과 선입견’이라는 ‘마음의 비늘’ 때문이다.

특히 인종, 성별, 정치, 종교에 대한 자기 확신이 지나치게 강한 사람은 자신과 다른 삶의 방식을 사는 사람과 소통이 불가하다. 이런 사람은 남의 생각은 ‘편견’이고 자기 생각은 ‘의견’이라고 고집한다, 또한 ‘듣기’보다는 남의 말은 중간에 끊고 자기 말만 쏟아내기에 몰두한 까닭에 논쟁을 유발한다.

편견과 선입견은 타인의 말과 생각을 들어줄 여백을 허락하지 않는다. 따라서 대화할 때에는 “많이 듣는 것이 곧 많이 말하는 것이다”라는 비밀을 기억해야 한다.

둘째 - ‘휴대폰 안식일’ 실천

휴대폰은 손 안의 컴퓨터이다. 휴대폰만 있으면 모든 것이 가능하고 휴대폰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역설을 낳았다. 그런데 휴대폰이 남긴 문제는 다른 것에 있다. 이제까지 소중히 여겨왔던 일상의 가치를 사라지게 만든 것이다. 곧 벗들과 식탁에 앉아도 잠시 대화 이후 각자 휴대폰을 꺼내 들고 자기들만의 세계에 빠진다. 만남에 대한 배반인 이런 무례함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은 채 말이다. 휴대폰은 “말하고 듣고”라는 ‘인격의 접촉’을 철저히 차단했고, 휴대폰을 붙잡은 손은 ‘한 권의 시집’이 놓일 공간과 여유를 빼앗았다. 자신의 생각도 휴대폰이 대신하고, 자신의 결정도 휴대폰의 정보에 의지한다. <월튼>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인간은 도구를 만들고 그 도구의 도구로 살아간다”라는 탄식에 공감하는 순간이다. 일주일에 하루만이라도 휴대폰을 잠그고 앞에 앉은 사람과 ‘듣고 말하기’에 집중하면 어떨까?

“휴대폰을 사용하는 것은 문명적이지만,

휴대폰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더욱 문명적이다”

셋째 - 문해력, 독해력 키우기

마이크 커닝햄의 소설 <세월>(1952) 속의 여인 로라 브라운은 한 남자의 아내이지만 틈만 나면 낮에 호텔을 찾는다. 다른 남자와의 은밀한 만남을 위해서가 아니다. 오직 “그 누구의 방해도 없이 두 시간 동안 책을 읽기 위해서”이다. 소녀시절부터 책읽기를 좋아하던 그녀는 결혼 후 삶에 지쳐 사람들과 소통이 단절된다. 그녀는 이런 암흑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시 ‘책읽기’를 선택했고 이후 그녀는 치유된다. ‘책읽기’는 자기정체성의 확립과 타인과의 정서적 유대감을 형성하는데 유효한 기여를 한다. 고전문학을 읽고 토론하면서 작가의 글과 생각을 “듣는 작업”을 체득하는 과정에서 타인의 말을 듣고 이해하는 문해력과 독해력이 증강된다. 타인과 소통이 있는 ‘열린 관계’를 위해서 ‘독서와 글쓰기’는 절대 필요하다. 독서를 통해 작가의 생각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갖게 되고,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손’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멜람푸스’의 출현을 기다리며

고대 그리스문학에 ‘멜람푸스’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어미 잃은 뱀을 보살펴 주었는데, 다 자란 그 뱀이 잠을 자는 멜람푸스의 귀를 핥자 이후 동물의 말을 알아듣는 능력을 얻게 된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동물의 말까지 들을 수 있는 ‘멜람푸스’라는 인물을 창작(創作)한 까닭은 무엇일까? 당시 시대가 사람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아 ‘사회적 보청기’가 필요한 독선과 불통의 시대라는 날이 선 고발이며, 하늘의 말과 사람의 말을 깊게 경청하는 열린 시대를 소망하는 간절함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김겸섭

성경해석 연구 공동체인 아나톨레와 문학읽기 모임인 레노바레를 만들어 ‘성서와 문학 읽기’ 사역을 하고 있으며, 현재 서울 방화동 한마음교회를 섬기고 있다. 저서로 <천사는 오후 3시에 커피를 마신다> <사랑이 위독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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