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아동생활공동체 ‘우리집’ 이야기

마석훈 선생님(사진 오른쪽)과 우리집 아이들.
아이들은 그렇게 마석훈 선생님이 만든 '우리집'에서 함께 씩씩하게 자라났다. 
'우리집' 아이가 직접 그린 우리집 일러스트

특집 : 당신을 환대합니다

“보편적인 인권은 어디에서 시작될까요? 작은 곳, 그리고 아주 가까운 곳에서부터입니다. 아주 가깝고, 아주 작아서, 그곳은 어떤 세계지도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곳은 각각의 사람들의 세계입니다. (중략) 작은 곳에서부터 인권을 지키려는 모두의 노력이 없다면 보다 큰 세계에서의 발전도 헛될 것입니다.”

1958년 세계인권선언 채택 10주년을 기념한 엘레노어 루스벨트의 연설이다.

그래서일까. 안산에 위치한 탈북아동생활공동체 ‘우리집’을 마석훈 선생님(사진 위)이 세운 마음 가운데에는 ‘우리가 이 땅에서 돌봐줄 부모가 없는 이 아이들을 따뜻하게 품어준다면 언젠가 통일의 시간에 역할을 할 것’이라는 작은 바람이 있었다.

‘당신들의 아이들을 곱게 키운 곳이 있습니다. 꽃제비 아이들을 정성으로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켜 시집 장가보냈습니다. 순수한 사람들의 작은 정성으로 그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총각 선생님이 세운 집

2007년 꽃제비 출신 아이들과 함께 젊은 마석훈 선생님이 생활공동체를 꾸린 것이 ‘우리집’의 시작이었다. 탈북민 정착 교육시설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홀로 탈북한 아이들을 만나게 되었다. 부모도 없이, 북한과 판이하게 다른 환경 속에서 또다시 고통하는 아이들을 보육원으로 보내려니 너무 마음이 아파서 같이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에게 교육보다 함께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애 한 명만 더 키우고는 끝이다 했던 것이 지금까지 이어졌네요. 아직 장가도 못 갔어요. 허허.”

처음 일을 시작하면서 이름을 고민하던 중 막내아이가 “그냥 우리집인데 무슨 이름이 필요하냐”고 한 말을 따라 ‘우리집’이라고 지었다.

물론 ‘우리’라는 말은 잘못 사용하면 배타적인 말이 된다. ‘우리’ 안에 포함되지 않으면 모두가 배척되는. 그러나 돌봐주는 사람 없이 남한 땅에 온 아이들에게 ‘우리’는 비빌 언덕이고 쉴 수 있는 품이 되었다.

남한에서의 현실을 살아갈 수 있도록

불편해하는 주위 시선 탓에, 없는 재정 형편에, 여기저기 이사 다니다 이제야 장기 임대로 터전을 마련해 살고 있다. 사회복지사들이 교대로 상주하고 아이들은 일반 학교에 다닌다.

“아이들은 결국 경쟁하고 부딪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적응할 수 있도록 일반 학교를 보냅니다. 공부는 하겠다는 아이들만 시키고, 아니면 기술을 배워서 앞가림을 하고 살 수 있도록 격려하지요. 현실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해요. 죽음의 경계선을 넘어온 이 아이들에게는 동기부여만 되면 잘해나가는 능력이 있어요.”

하지만 마음 아픈 구석들은 많다. 굶주림으로 인한 장기간 영양 결핍의 후유증으로 남한의 또래들에 비해 보통 10~30cm 정도의 신장 차이를 보인다. 이 때문에 외모에 대한 열등감이 있고, 정든 고향을 떠나 중국 등 제3국을 떠돌면서 체포와 강제송환의 두려움 속에서 불안한 신분으로 살아야 했던 상처가 깊다. 도망자 신세로 학대받던 기억, 가족 친지와 생이별한 고통은 쉽게 지워지지 않고 몸과 마음에 깊이 남아 남한에 온 후에도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된다.

“아빠가 자식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을 보며 목을 빼놓는 아이들을 볼라치면, 아플 때 서러워 엄마 찾는 모습을 볼 때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명절에 특히 차분해지고 비 오는 날 축축해지는 아이들 보는 것도 고통입니다.”

하지만 마 선생님은 말한다. 자신은 부모의 역할을 잠시 대신하는 존재로서 최소한의 몫만 겨우 하고 있고, 결국 나머지는 아이들이 성장해 부모가 되어서 다른 이들을 채워주면서 스스로 치유해 가야 한다고. 어설픈 엄마나 아빠가 되어 그 말의 순결함을 더럽히지 않겠다는 다짐이자 계약의 말이 ‘쌤’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마 선생님을 그저 ‘쌤’이라고 부른다.

통일을 위한 자세

통일 하나! 가지게 되더라도 남에게 거만하지 않게 베풀고,

통일 둘! 도움 받아 살더라도 비굴하지 않게 받으며,

통일 셋! 누구 하나 소외됨이 없도록 늘 깨어있으며,

통일 사천만! 가난한 이웃을 섬기기 위해 내 삶을 나누고,

통일 팔천만! 한반도의 평화 공존을 위해 노력합니다.

우리,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함께 갑니다!

- <우리집 가훈>

“우리는 너무나 경제적인 통일, 정치적인 통일만 생각하다 보니 놓치는 게 많은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의 탈북민을 대하는 태도에는 제국주의적 방식이 가득해요. 못사는 북한에서 와보니 남한 사회 좋지? 이런 식의 거만한 태도들.

건강하고 좋은 통일은 그냥 남북 주민 사이에 자연스럽게 결혼하고, 친구도 되고, 선후배도 되는 거라 생각합니다. 도드라지게 보고 호들갑 떠는 것은 환대가 아닙니다.”

“우리는 한 번도 북한에서는 봄에 어떤 꽃이 피냐고 물어보지 않습니다. 뭐하고 노냐고 물어보지도 않습니다. 고통을 쑤시고 다니면서 나의 우월함을 강조하는 ‘가벼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고통을 겪은 사람들을 대하는 자세가 그 사회의 수준입니다.”

지금 ‘우리집’에는 남자아이 4명, 여자아이 4명이 거주하고 있다.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 아이들까지 이제 꽃제비 출신은 한 명밖에 없다.

“사람들은 아직까지 장가도 못 가고 어떻게 하냐고 말합니다. 걱정 마세요. 23년간 75명 아이들을 키우느라 발목 잡혀 살아본 인생도 꽤 괜찮았습니다. 전 그렇게 대단하게 희생하고 산 사람이 아닙니다. ‘큰 숲을 지나니, 내 키가 커졌다’는 말처럼 ‘변화’의 시간이었고, 마지막 아이까지 다 키우면 저도 다르게 살아볼 거예요. ‘다음 마을로 가자’는 예수님 말씀처럼 다음 주제, 다음 삶으로 가려고 합니다. 올겨울에는 남한을 떠나 유럽에서 살고 있는 우리집 아이들 만나러 갑니다. 저는 장가도 못 갔는데, 돌본 아이들은 결혼도 하고 그곳에서는 탈북민이란 손가락질도 안 받고 자유롭게 산답니다.”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온 아이들을 환대했던 마석훈 선생님 이야기는 우리에게 경종을 울린다. 우리에게 날아온 인연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우리가 환대를 하든 안 하든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결국 자유를 찾아 또 다시 날아오를 수 있을 텐데, 우리는 환대하는 척을 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가 진짜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고 있기는 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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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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