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일을 하나 크게 망쳐보세요. 그럼 일이 줄어들 거예요.”
갈수록 늘어가는 일에 쫓겨 허덕이다 나도 모르게 푸념을 늘어놓자 옆에서 들었는지 아들아이가 조언을 한다. 기가 차다. 어디서 저런 ‘지혜’(?)가 나왔을까? 혹시 이 녀석은 그동안 저런 생각에서 늘 제 일을 설렁설렁 해냈던 걸까? 환생을 믿지 않는 기독교인이지만, 가르쳐주지도 않은 말을 하는 아이들을 보다 보면 문득 노자나 장자가 다시 태어났나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무위(無爲), 아무 것도 행하지 않음. 노장사상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장자는 초나라 임금이 함께 정치를 하자 초청을 했음에도 제사용 돼지 예화를 들어 그 청을 거절했다고 전한다. 아니 한 나라 임금이 부르는 절호의 기회인데, 그걸 왜 거절을 하나? 폼 나는 자리 하나를 위해 스펙 쌓기에 열심인 현대인들에게는 도대체 이해가 안 될 일이다. 장자의 논리는 이렇다. 돼지 입장에서야 진흙탕에서 더럽게 흙 묻히고 굴러도 맘 편히 제 수명 다 누리며 오래 사는 것이 낫지, 깨끗하게 씻겨 비단 옷 입고 제사상에 올라가는 것이 나을 리 없다는 것이다. 장자 시절은 더욱 어수선하고 혼란했겠지만 예나 지금이나 정치에 관여한 이가 하늘이 내린 제 수명을 다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자연과 벗 삼아 순리대로 사는 ‘쉼의 전략’을 일찌감치 터득한 장자는 인류의 스승 중 하나라 여겨지는 것이리라.


‘쉼의 전략’

물론 삶의 지혜를 가르친 스승들이 모두 노자, 장자 같지는 않았다. 그 반대 축에 속하는 이른바 ‘유위’(有爲)를 가르친 대표적인 스승으로는 공자가 있다. 그는 배우고 또 배우는 삶, 즉 끊임없이 자기를 수련하고 연단하여 궁극적으로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이루는 삶을 의미 있는 삶이라 했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처럼 유교적 ‘유위’의 삶을 내면화한 문화권에서는 ‘선비가 삼 일을 못 보다 서로 만나면 그 발전한 모습에 눈을 비비고 놀라 바라본다’는 ‘괄목상대(刮目相對)’의 자세를 높이 평가하며 쉼 없이 자기를 갈고 닦는 삶, 배우고 또 배우는 삶을 지향했고 실천해왔다.
그러고 보면 우리 기독교 전통에서도 이리 영혼과 몸의 정진을 쉬지 않았던 가르침이 있었다. 근대 세계가 막 생성되던 시기에 맞물려 등장했던 금욕주의적 개신교도들의 노동윤리이다. 이들은 주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시간과 능력을 최대한으로 사용하고 가장 합리적으로 조절해야 한다고 믿었다. 18세기 미국 청교도의 대표적 인물인 벤자민 프랭클린은 이렇게 말했다.
“시간은 돈이다. 신용도 돈이다. 매일 노동을 통해 10실링을 벌 수 있는 사람이 반나절을 산책하거나 자기 방에서 빈둥거렸다면, 그는 오락을 위해 6펜스만 지출했더라도 그것만 계산해서는 안 된다. 그는 그 외에도 5실링을 더 지출한 것이다. 아니 갖다 버린 것이다. 5실링에 해당하는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은 5실링을 잃는 것이며 5실링을 바다에 던져 넣는 것과 똑같다. 5실링을 잃는 자는 단지 그것의 총액만을 잃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해서 벌 수 있었을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노동과 쉼의 사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신자로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열심히 살아야한다고 믿었던 개신교도들은 덕분에 쉼 없이 일했다. 이 땅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소명’으로서의 자기 일에 매진케 했던 믿음이 개신교도들의 노동 윤리였다.
혹자는 그런다. 자본주의의 발생 시점에서 생성된 이 개신교도들의 독특한 노동관과 직업윤리덕분에 개신교도들이 현대 경제체제의 승리자가 되었다고…. 한국의 경우는 유교적 ‘유위’의 성실성에 개신교의 ‘소명적 노동관’이 가세해서 쉼 없이 일하는 산업일꾼의 모델을 양산했다고. 상당 부분 타당한 분석이다. 현대관료제의 이상적 인간인 ‘전문기계’같은 개인은 개신교적 이상형인 ‘주의 도구’와 밀접한 친밀성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어찌 인간이 기계일까. 어찌 쉼 없이 일만 할까? 실은 쭉 쉬라는 노장사상이나, 쉼 없이 자기개발을 하라는 유교사상, 청교도사상 양자가 모두 잊고 있는 중요한 지점이 있다. 모든 생명은 노동과 쉼 사이에 역동적인 상호관계를 유지하며 성장한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하나님도 쉬셨다. 무소부재,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까짓 6일 일하셨다고 피곤하시거나 기력이 다하여 7일째 쉬셨을 리는 만무하다.
멈춤. 쉼. 비움. 돌아봄. 실은 이 과정도 모두 창조의 일부이며 생명의 모습이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우주창조라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휘몰아치듯 6일 동안 행하시고 난 뒤, 잠시 멈추시고 자기를 비우려하셨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생명의 소리를 들으시려… 지으신 만물의 반응과 움직임을 보시려… 나를 비운 그 자리에 비로소 채워지는 피조물의 몸짓을 담으시려고….

진정한 쉼

바야흐로 ‘휴가’의 계절 여름이다. 어디에 가서 뭘 하며 놀까? 벌써부터 여름휴가 계획을 세우는 지인들이 많다. 발빠르게 움직이지 않으면 좋은 곳은 다 남들 차지라며 서두르라 조언하는 이들도 있다. 심신이 피곤하도록 꽉 짜여진 일정, 볼거리 즐길 거리 많은 곳에서 내 눈 요기만 하며 요란하게 지내고 온 날들…. 그걸 또 잔뜩 사진으로 담아 돌아오는 즉시, 아니 이제는 스마트폰을 이용하여 바로 실시간으로 블로그에, SNS에 올려 ‘자랑하는’ 부지런함….  이리 분주한 여름휴가를 보내고 온 것을 과연 ‘쉬다 왔다’고 할 수 있을런지….
진정한 쉼은, 바로 그 분주함을 내려놓는 것이 아닐까? 내 의지였던 밀려서 했던, 성찰 없이 관성처럼 내몰아쳤던 일에서 잠시 벗어나, 내가 해 온 것들을 돌아보고 그 일을 하는 동안 내가 타인에게 행했던 행위도 곱씹어보는 그런 ‘멈춤’의 시간이어야 하지 않을까?
성서가 말하는 쉼은 내 의지, 내 노력, 내 주장의 멈춤이지 싶다. 자기 비움의 순간이요 자리이지 싶다. 나를 비워낸 바로 그 지점이 비로소 하나님과 이웃의 의지, 노력, 주장을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는 자리가 된다. 내 계획, 내 목표, 내 의도로 가득 찼던 나의 일을 잠시 놓고, 접고, 멈추고…. 비로소 ‘너’를 마주하고 ‘너’를 보며 그 몸짓과 음성을 헤아리는 그런 ‘쉼’을, 올 여름엔 가져보았으면 한다. 흠, 어쩌면 아들아이 말대로 일을 하나 망쳐야 비로소 가능할 일일지도 모르겠다.

백소영
이화인문과학원 HK연구교수이다. 다양한 문화현상들을 그녀만의 따스한 시각으로 분석한 강의와 글쓰기로 기독교세계관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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