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은 ‘기적’이 아니라 ‘사랑의 흔적’

아버지에게 딸은 ‘가슴에 박힌 못’이었다. 어려서부터 지나칠만큼 총명하고 조숙했던 그 딸은 아버지의 사랑이자 자랑이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결혼한 다음부터는 계속되는 불행에 휘청거렸다. 새파란 나이에 이혼한 것만으로도 가슴이 무너지는데 그 곱던 딸이 암에 걸렸단다. 아버지의 가슴에는 그렇게 빼낼 수 없는 굵은 대못이 박혔다.
이민아 목사. 최근 ‘땅끝의 아이들’(시냇가에심은나무)로 주목을 받은 그는 익히 알려져 있듯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의 딸로 세인들의 뇌리에 새겨져 있다. 지난해 이 전 장관이 ‘지성에서 영성으로’(열림원)를 내며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을 때,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그 날카롭던 논객의 회심도 회심이려니와 그의 회심이 바로 딸인 이민아 목사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또 다른 이야깃거리였다.
이 전 장관은 “암에 걸렸던 너의 아픔과 어둠이 나를 영성의 세계로 이끌어 주었다. 70평생 살아온 내 삶이 잿불과도 같은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준 것”이라고 고백했다. 가슴에 박힌 못이 치열한 고통의 극한을 넘어 ‘새 살’로 변화되는 연금술의 이적을 보여준 것이다.
그때 딸은 아버지에게 사랑을 이야기했다. “아빠 정말 그렇죠. ‘사랑’은 ‘설명’이 아니지요? 외쳐야만 되돌아오는 산울림소리가 아니지요? 잘났든 못났든 아빠가 절 사랑해 주시는 것은 복잡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제가 딸이니까 사랑하는 것이지요. 그것처럼 우리에게 생명과 영혼을 주신 하나님도 그럴 거라고 믿어요. 다만 제가 아빠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그 사랑과 은혜를 제대로 느낄 줄 몰랐던 것뿐이지요. 그것을 깨닫고 나서야 편안한 삶이 돌아오게 된 것이죠”라고.
그런 이민아 목사가 11월 13일 사랑의교회 ‘2011 새생명축제’에 참석해 자신의 삶과 신앙에 관해 이야기했다. 담담하게 힘들었던 지난날의 삶과 하나님을 만나게 된 과정을 이야기한 그는 자신의 삶을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흔적일 뿐”이라고 털어놓았다.

 

세상의 선, 그리고 악

그녀의 모습은 생기가 넘쳤다. 힘든 병을 앓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야기하는 그녀의 두 눈은 빛이 나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을 타고 전해지는 어떤 진심이 마음에 와 닿아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가 겪었던 수많은 일들을 상상해보았다. 이혼, 아들의 죽음, 암, 실명 위기, 아들의 자폐 증세까지…. 감히 그 심정까지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쩜 저리 환하게 웃을 수 있을까’라는 물음표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민아. 그녀는 이어령 교수, 강인숙 건국대 명예교수의 1녀2남 중 맏이로 태어났다. 이화여대 영문과를 3년 만에 조기졸업한 수재인 그녀는 유명한 아버지 이름에 누가 되지 않으려고 열심히 공부했다. 그렇게 사회에서 성공하고 잘 되는 게 부모님께 도리이고, 자신의 행복이라 여겼다.
“제가 노력해서 좋은 학교, 좋은 직장을 가면 그것이 선이라고 생각했어요. 좋은 사람 만나서 그 사람도 날 좋아하고 결혼하고…. 돈 많이 벌어서 내 아이들이 인생을 편안하게 살 수 있게 해준다면 그게 곧 선이었어요. 실패하면, 불행해지면 그것이야말로 악이었죠.”
세상의 성공이 곧 선이었다. 세상이 부러워하고 인정해주는 지위, 부귀, 명예 이것은 선 그 자체요, 세상의 불행과 실패는 악이었다. 세상의 기준이 곧 그녀에게 선악의 기준이었던 셈이다. 행여나 나쁜 일이 생길까 두려웠다. 지금 누리는 행복을 놓칠까봐 늘 긴장했다. 실패는 절대 있어선 안되는 일이라 여겼고, 늘 손에 잡은 행복을 잃을까 더 열심히 살았다.
남부러울 게 없는 그녀였다. 소위 세상이 말하는 좋은 학교, 좋은 직장,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가정도 이뤘다. 재정적인 부분까지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렇게 일상은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평탄하고도 행복하게. 내가 아직 가지지 못한 게 있다면, 무조건 달려가 잡았다. 열심히 달려가면 잡을 수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저 멀리 하늘 어디에 계셔서 나와는 상관없는 그런 존재였다. 그런 하나님이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아버지’로 바뀐 건 10년 전의 일이다.

 

겨울 그리고 봄

진짜 사랑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아버지, 어머니께 충분히 받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그 사랑을 드디어 만났다. 22살의 어린 나이도 겁나지 않았고 무서울 게 없었다. 서로에게 완벽한 존재라 믿고, 단둘이 미국으로 간다. 사랑하는 사람과도 완전한 일치는 쉽지 않았다. 첫 아이 유진이가 4살 되던 해에 이혼을 했다. 그렇게 결혼에 실패하고 상실감과 실패감으로 하루 하루가 괴로웠지만,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는 죄송해 힘들단 말 한번 해보지 못한 그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진은 한 가닥 희망이었다.
“첫 아이 유진이를 낳아 눈을 마주한 순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따뜻했어요. 모성애는 하나님이 하시는 사랑을 우리도 느낄 수 있게 주시는 선물 같아요.”
결혼한 다음 해에 태어난 사랑하는 아들 유진은 낮에는 법대 공부 하고, 밤에는 아르바이트 하는 유학생 엄마의 속을 아는지 혼자서도 쑥쑥 잘 커주었다. 사춘기를 겪으면서 엄마를 많이 힘들게도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자랑스럽고 고마운 아들이었던 유진이가, 어느 날 감기에 걸린 것 같다고 했다. 흔한 감기라 여겼다. 그런데 아이가 갑자기 혼수상태로 빠진지 19일, 아이의 심장은 뛰지 않았다. 그렇게 25살의 꽃다운 나이에 사랑하는 아들을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보내야만 했다.
‘하나님. 부모를 공경하면 장수한다고 했는데, 왜 우리 아들은 그리 일찍 데려가셨어요? 자격도 없는 엄마 아빠를 그렇게 항상 존경하고 사랑해준 아이가 또 어디 있나요. 네? 부모말 안듣고 나쁜짓하는 얘들도 멀쩡히 사는데, 왜 우리 착한 유진이는 먼저 데려가야 해요? 말씀 좀 해보세요. 네?’ 
이해되지 않았다. 하늘이 무너진 듯 했다. 삶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그렇게 1년을 울면서 보냈다. 아이가 죽고 1년 동안은 그간 해오던 청소년 사건도 맡을 수가 없었다. 유진이가 살아있을 때부터 비행청소년들을 변호하는 변호사로 법정에 서고, 방황하는 아이들을 부모와 화해시키는 일에 보람을 느꼈던 그녀였지만, 사랑하는 아들을 떠나보낸 어미의 마음엔 생명을 거두어 가신 하나님에 대한 분노와 원망뿐이었다. 일로 만나는 아이들조차 보기가 힘들었다.
그랬던 그녀의 마음이 녹기 시작했다. 변함이 없는 아버지의 사랑에 아들의 죽음이 감사의 기도로 바뀌는 기적이 마음속에서 자라났다. 원망하고 분노하던 그녀에게 하나님은 끊임없이 사랑으로 말씀하셨다. 거부하는 그녀를 끝까지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사랑에 봄눈 녹듯 스르르. 아들의 묘비에 ‘Resting in his Father’s house.’ 라 새겼다. 아버지 집에서 쉬고 있다는 아들의 묘비명을 볼 때마다 아들의 육신은 거기 묻혀 있지만, 영은 살아서 영원히 죽지 않고 아버지 집에 있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곤 했다.
유진이가 떠난 후, 그녀는 유진이 또래의 많은 청년들을 만나 그들이 비전을 찾고, 부모와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보았다. 유진이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많은 씨앗을 그녀에게 전해주었을까?

 

자폐증 앓는 둘째 진성이

“둘째 아들 진성이가 다섯 살이 되던 해 유치원에 들어가면서부터 이상하단 생각에 병원에 데려갔어요. 처음엔 증상을 보고도 의사들은 확실한 병명을 몰라서 과잉행동, 조울증, 주의결핍 등 다양한 소견을 냈는데 나중에야 아이가 자폐가 있단 걸 알았어요. 초등학교를 다섯 번이나 옮겼어요. 가는 데마다 쫓겨났죠. 아이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저를 너무 힘들게 할 때면 밉기도 했어요. 그 때는 정말 지칠대로 지쳐 있었어요.”
자폐증세가 심해지는 아이를 보면서 엄마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 의사들은 모두 회복은 불가능하다며 진정제 정도만 투여해 줄 뿐이었다. 어미도 사람인지라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자식을 보면서 무조건 사랑하기가 힘에 부쳤다. 엄마가 이렇게 노력하는데도 좀처럼 나아지질 않는 아이가 때론 원망스럽기도 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고, 알 수 없는 미궁으로 빠지는 듯 했다.
아이를 위해 몇 년을 기도하며 기다렸다.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기적이라는 말 밖에는 설명할 수 있는 다른 단어가 떠오르질 않는다. 진성이가 16살 되던 해였다. 아이에게서 자폐 증세를 눈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퍼즐 조각

1992년, 그녀는 갑상선암 판정을 받았다. 사실 처음엔 무서웠다. 아프니까 마음이 약해졌다. 한 달이 지나고, 날로 마음에 평안이 샘솟았다. 아버지가 계신다는 믿음이 그렇게 평안을 줄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암은 다시 그녀의 삶을 휘감았다. 96년과 99년 암 재발. 길고 긴 시간이었다. 의사들은 3개월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복수가 차, 배가 볼록해졌을 때도 그녀에겐 ‘아버지’라는 희망이 있었다.
2006년, 망막이 손상되어 갑자기 앞이 보이질 않았다. 망막박리. 눈이 보이질 않자 두려움이 엄습했다. 아버지를 부르며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그 분의 뜻이 이해되지 않았다. 7개월의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기약 없는 기다림은 사람을 지치게 한다. 그렇게 앞이 보이지 않은지 6개월 무렵, 철저한 무신론자였던 그녀의 아버지가 딸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민아가 어제 본 것을 내일 볼 수 있고 오늘 본 내 얼굴을 내일 또 볼 수만 있게 해주신다면 저의 남은 생을 주님께 바치겠나이다.’ 본인을 무신론자라, 이성주의자라 자처했던 그녀의 아버지, 이어령 교수의 고백이다.
기적이었다. 그녀가 볼 수 있게 된 것, 그리고 무신론자였던 그녀의 아버지가 무릎을 꿇게 된 것도.
놓아 버리고 싶은, 인정하기 싫은 삶의 이야기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자신의 삶을 통해 어떤 일을 하고 계시는지 이제야 보인다고 그녀는 고백했다. 사람들이 말하는 고난과 시련이 자신에겐 축복이었다고. 그녀 인생이 하나의 퍼즐처럼 한 조각 한 조각 맞춰지면서 하나의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그녀의 삶은 기적이 아니다. 그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흔적일 뿐이다.

 

박정은 기자 springday@iwithjes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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