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계절

예수부활에 대한 믿음은 기독교신앙의 핵심인데도,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이들 중에도 이에 대해 갸우뚱 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아직 복음서에 기록된 ‘빈 무덤’에 관한 말씀과 깊이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이겠지요.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누가복음 24장 5~6절)

사복음서에 각각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음에도 초월적 하나님을 좁은 상식의 틀 안에 가두어두고, ‘상식으로 이해 안 된다’고 떠들어댑니다.

무덤을 찾아간 이들의 마음

예수를 따르던 이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둔 무덤을 찾았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던 예수의 죽음을 직시하고 황망한 마음이 되어 있다가, 안식일이 지난 후, 향품을 가지고 무덤을 찾았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여러 차례 말씀하셨지만, 정작 이들은 ‘부활 신앙’보다 사랑하는 이의 ‘시신’에 대한 예의에 집중했습니다. 세상을 이기고 역사를 새롭게 하시는 ‘구세주 예수’라는 인식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아프리카의 한 불교인이 기독교로 개종한 이유를 들어봅시다.

“만일 당신이 길을 가다가 길을 잃었다면, 죽은 사람에게 길을 묻겠습니까? 당연히 산 사람에게 묻지 않겠습니까? 내가 기독교로 개종한 것은 죽은 석가모니에게 길을 물을 수가 없어서, 아니, 거기에 답을 찾을 수가 없어서, 부활해 살아있는 예수님에게 인생의 길과 구원의 길을 물어보려고 개종했습니다.”

대답이 명쾌하지 않습니까!

기독교의 특징, 십자가와 부활

미국 타임지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선교사로 뽑았던 인도의 미국인 선교사 스탠리 존스의 경험담입니다. 어느 날 노방전도를 하고 있을 때, 한 이슬람교도가 와서 이렇게 얘기하더랍니다.

“우리는 당신네 기독교인들이 못 가진 것 하나를 가지고 있소. 메카에 가면 마호메트의 시체가 들어있는 관이 있어서 우리는 정말 그분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당신네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에 가도 빈 무덤밖에 볼 수 없지가 않소?”

그 무슬림의 이 우문(愚問)에 스탠리 존스의 대답 역시 명쾌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당신네 이슬람교와 우리 기독교의 다른 점입니다.”

그 ‘빈 무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예수 부활의 ‘확실한 증거’아니겠습니까. 부활하셔서 승천하셨으니, 그 무덤 안에서는 그분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만날까?

예수님은 ‘현재’ 속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미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하셨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미 말씀하셨던 대로, 갈릴리 동네로 가실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과거에, 고정관념에 묶여있으면 지금 살아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여전히 어제의 예수,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기억만 있었습니다. 죄의 형벌을 대신 받으며 죽으신 예수님의 기억에만 사로잡혀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 보고 돌아갔다고 기록되었습니다(누가복음 23장 55~56절).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진정한 예수님을 만나는데 ‘기억’이 전부가 된 것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2천년 전 팔레스타인 지역을 다니시던 예수님을 ‘순례’를 통해 더듬어 찾고 있습니다. 그것도 소중하고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오늘’입니다.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서 우리 가운데 계셔서, 부활의 능력을 나타내시며 지금 우리 중에 임재하신다는 사실을 믿을 때, 과거가 아닌 현재의 삶 속에서 그분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의 말씀을 기억할 때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이나 여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했던 큰 이유는 그분의 말씀을 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잊고 느낌과 관념에만 의존하다보니 부활의 놀라운 새 역사가 눈앞에 펼쳐졌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덤을 지키던 천사들은 반복해서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라’고 강조합니다.

말씀을 잊고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말씀을 기억하고 갈릴리로 간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서 ‘만져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체험에서 오는 느낌이 아니라, ‘말씀’입니다.

최동묵

신광두레교회 담임목사. 남양만 두레마을에서 김진홍 목사와 공동체생활을 시작으로 44년째 ‘두레인’이다. 목회의 영역을 사회로 확장하여 복음의 영향력을 극대화하는 데 관심이 많은 목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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