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청년미래은행 이종수 이사장

어려운 이웃 자활 돕기 위해… 청년들 재정교육에 나서

과거의 맹세를 기억하다

외국계은행을 다니며 넉넉한 급여와 좋은 집, 일에 대한 성취감 속에서 자족하며 살아왔던 은행가가 있었다. 실적 덕에 해외 곳곳에서 그를 필요로 했고, 그렇게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20년 가까이의 세월을 살았다.

“행장님, 큰일 났습니다. 캄보디아 내전이 터졌습니다. 공항도 다 파괴된 상황입니다.”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1996년 캄보디아에 은행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었는데, 인도네시아에 출장 갔던 사이 캄보디아 내전으로 인해 폭격이 시작된 것. 직원과 가족은 무사했지만 어렵게 사무실로 가는 길에 보이는 시가지 모습은 그야말로 폐허였다.

그때 기억이 났다. 대학생 시절, 시국사건으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해야 했던 그 암울한 시절에 조그만 감방에서 함께 생활했던 사람들과 그 사이에서 자신이 가졌던 결심을. 그들보다 자신이 가진 것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그들을 보며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살자’고 스무 살 청년은 맹세했다.

“처음으로 제 인생의 방향을 잡았던 맹세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저는 온통 나와 내 가족만을, 내 작은 성만을 지키기 위해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에 고개를 돌리고, 얼굴을 파묻었습니다.”

잘 나가던 회사를 나와서

청년미래은행 이종수 이사장(사진)은 그때를 뒤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더 이상 이렇게는 살 수 없을 것 같아 얼마 후 회사에 사표를 냈다. 고액의 연봉을 내려놓다니, 많은 이들이 만류했지만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결심이 생활을 이겼습니다. 회사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가슴이 시키는 대로 행동했습니다. 머리가 생각하는 삶을 살다가 어느 날 맞닥뜨리게 된 것이 ‘허무’였습니다. 저는 이 ‘허무’야말로 가장 소중한 터닝 포인트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들에겐 ‘결핍’일 수도 있고, 어떤 이에겐 ‘후회’일수도 있지만요.”

그렇게 회사를 나온 후 꼬박 1년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지냈다고 한다. 주일이면 교회 가고 아닌 날은 가족 챙기고 하루 종일 혼자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그 시간을 이 이사장은 ‘마흔셋까지 살아온 내 인생을 제대로 뒤돌아 볼 수 있었던 천금 같은 시간’이라 명명한다.

“제 손으로 설립한 은행만 세 개였습니다. 평범한 은행 직원이었는데, 어느새 은행 설립 전문가가 되어있었던 거죠. 그런 제가 앞으로 어떤 일을 할 것인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계속 생각했어요.”

‘보이지 않는 손’이 내 인생을 이끌어 왔다. 하나님이 나를 어떤 방향으로 인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정교하게 계획된 과정을 경험하면서 어떤 목표를 향하여 가고 있었다.…돌아본다는 것은 의미를 찾는 시간이다. 단지 지난 일을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일과 일, 사건과 사건 사이의 맥락을 찾고, 그 맥락 사이에서 보석처럼 빛나며, 우리들의 인생을 진군케 했던 의미를 밝히는 것이다. - 이종수 저 <희망은 격렬하다> 중에서

그렇게 인생을 복기하던 시간이 1년쯤 되어갈 즈음 이 이사장은 특별한 제의를 받는다. 한국에서 들여온 차관으로 인도네시아 농촌 빈민들에게 직업 훈련을 시키는 프로젝트 수석 컨설턴트 자리였다. 농촌 빈민을 위한 직업 훈련 프로젝트라니,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는 것 같아 망설임 없이 수락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 기술훈련만으로는 가난을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먹고 살려면 기술이 필요한데, 그 기술을 활용해 자기 사업을 할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해주는 제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 마이크로크레디트(micro credit, 자활 의지를 가지고 있는 빈민과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하는 무담보 소액대출제도)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동안 외국에서 시도했던 마이크로크레디트를 한국에서 해보자 마음먹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1999년 1월 오랜만에 돌아온 고국은 IMF를 겪으며 참담한 상태였다. 취직도 너무나 힘들고, 조그만 가게라도 차리려 해도 담보와 보증이 없는 이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금융회사는 없었다. 결국 이들은 높은 이자를 지불하고서라도 대부업체나 사채를 이용했고, 부익부 빈익빈의 악순환은 심화되어 있어,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마이크로크레디트’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마이크로크레디트를 시작하다

“마이크로크레디트로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한 방글라데시 그라민은행의 경우 대출받은 600만 명의 빈민들 가운데 58%가 빈곤에서 벗어났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다른 우리는 한국에 맞는 모델을 개발해야만 했습니다. 돈을 무담보 무보증으로 빌려주는 대신 함께 사업을 한다는 개념으로 일하는 것이 한국형 마이크로크레디트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2002년 사회연대은행을 설립했다. 자본금이 5천만 원밖에 안 되는 초라한 은행,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은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사회연대은행 첫 사업은 여성 가장들로 구성된 자활공동체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남편의 사망과 장애, 질환 또는 이혼 등의 이유로 여성가장이 된 이들에게 한 대기업의 기부금으로 각각 사업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대출금은 고스란히 상환되었고, 그들에게 상환금액의 절반을 격려금으로 되돌려주었는데, 어떤 이는 그 격려금의 절반을 다시 사회연대은행에 기부했다.

그런 식으로 차근차근 저소득 저신용 영세 자영업자를 지원했다. 수많은 자영업자들이 사회연대은행에서 희망을 대출받아 새 삶을 살게 되었다.

 

또 내려놓다

당시 이 이사장은 사회연대은행 대표와 에이온 코리아 사장을 겸직했었는데, 점차 사회연대은행 일이 많아졌다. 2010년 아내에게 고액의 연봉을 주는 회사를 그만두고 사회연대은행에 전념하겠다고 말했다.

“그만두겠다고 마음먹고 산티아고 길을 한 달간 걸었어요.”

며칠 걸은 후 깨닫게 된 것은 너무나 많은 것을 끌어안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결국 한 번도 쓰지 않은 것은 모두 버렸다. 가벼워진 배낭 무게만큼이나 걸음도 편했다.

“내려놓는다는 것은 또 다른 시작을 위한 출발입니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내려놓지 않으면 다른 것을 쥘 수 없는 것처럼, 비우지 않으면 채울 수 없어요. 내려놓아야 기회가 생겨요.”

캄보디아의 결심처럼 스페인에서의 결심은 삶의 방향을 점검하고 올바로 가기 위해 선택하는 시간이었다. 2012년도 대표직에서 내려왔지만 그렇게 마음을 다해 일군 사회연대은행은 지금도 여전히 순항 중, 누군가의 실제적인 힘이 되고 있다.

“이후에 2017년 IFK 임팩트 금융이라는 유한회사를 만들었어요. 비영리법인 가지고는 투자를 못 하는 등 한계가 있어 다른 모델을 만들어본 거지요. 소셜 임팩트금융은 사회금융으로 청년문제와 고령화, 환경과 지방 소멸 4가지 주제에 초점을 맞춰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자본을 투입하는 것입니다.”

위안부 할머니, 장애인, 실업 등 임팩트 금융은 고질적이면서도 복잡한 사회 문제들에 접근하는데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체인지 메이커를 발굴하고 투자한다. 예를 들어 ‘지방에서 왔습니다’ 행사를 개최해 서울 밖에서 변화를 만드는 청년들에게 네트워크 구성과 협력 등을 제공하였다. 이 역시 지금은 젊은 후배에게 맡겨놓고 뒤로 물러섰는데, 이 이사장의 20년을 뒤돌아보니 그 시간동안 1800억원 펀딩과 자영업 2800개 창업 등 숫자만이 아닌 이웃의 삶이 남아있었다.

청년재정교육 합니다

이 이사장의 지금 직함은 청년미래은행 이사장이다.

“청년 멘토링 사역을 하고 있는 ‘청년의뜰’에서 멘토를 하게 되면서 청년들의 재정교육이 절실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청년 상당수가 신용도가 낮고 담보가 없기 때문에 금융 사각지대에 놓여있습니다. 돈을 모으고 나누고 쓰는 법을 알려주기 위해 이 과정을 만들었습니다.”

대표적인 사업은 ‘배워요’와 ‘모아요’인데, 6개월 금융 멘토링을 받으면서 60만 원을 저축하면, 청년미래은행에서 40만 원을 더해 총 100만 원을 모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업이다. 또한 ‘빌려요’는 연이율 3%로 최대 400만원을 빌려준다. 1년 과정인데 빌린 돈을 다 갚으면 냈던 이자를 그대로 돌려준다. 두 과정 모두 전문 교육을 받은 재정 메이트의 일대일 컨설팅이 포함돼 있는데, 소비습관을 살피고 변화시키도록 한다.

지난해부터 시행했는데 반응이 뜨겁다. 올해 시티미션교회(이규 목사)는 금융 사각지대에 있는 청년들을 위해 4억원을 후원하기도 했다. 최근 ‘모아요’ 3기 청년 100명을 모집하고, 4기는 내년 5월쯤 신청 받을 예정이다.

“뒤돌아보니 20년은 가족을 위해 살았고, 이후 20년은 한국사회를 위해서 나름대로 살았더군요. 앞으로 20년은 최근 새롭게 터전을 마련한 원주에서 하나님 관계 속에서의 나를 찾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지역사회와 연계해서 하나님이 이끄시는 삶을 살고 싶어요. 지난 모든 경험들이 또 합력해서 선을 이루겠지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찾으려고요.”

이 이사장은 생의 중요한 순간 뒤를 돌아보았다. 잘 걸어가고 있는지, 방향은 맞는지 살피고 아니면 과감하게 결단했다. 누군가에게는 잃는 것처럼 보이고, 내려오는 것같이 보였겠지만 그는 늘 길을 잃지 않고 걸어가는 사람이었다.

이경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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