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이야기 속에서 발견하다

어릴 적에 동화책이 모르는 세계를 상상하며 마음을 자라게 했다면, 성인이 되며 접하는 ‘말’과 ‘글’은 삶에 적용하며 확인하고 확장해 가게 한다. 그 가운데 어떤 종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지, 시간의 많은 부분이 어디에 쓰이는지를 보면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주제를 알 수 있다.

어떻게 보석을 찾아 엮을까

어떤 이야기이거나 큰 줄거리는 거의 비슷하다. 태어나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다 죽는 것. 차이는 그 속에 들어 있는 작은 디테일이므로 문제를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각각의 경우마다 사연이 있어, 거기에 나타나는 삶의 방식을 들여다볼 때 필요한 ‘보물’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20세 젊은이들이 의로운 마음으로 세계 대전에 참여했다가 하나씩 전사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러다 정신적인 지주마저 떠나보내며, 전쟁에 대한 회의와 허무해 보이는 죽음들 앞에서 주인공 폴은 물끄러미 하늘을 바라본다. 그때 총탄이 날아와 그마저 쓰러지는데, 최고사령부에서는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발표가 나온다. 전쟁 전체를 볼 때 서부 전선은 지켜진 상황, 개인의 존재 여부는 미미한 통계일 뿐인가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 속에는 생각해 볼 이면이 있다. 그 가족, 어머니에게 전해진 죽은 이들의 사사로운 사연과 그 이후의 변화다. 이야기를 잘 들여다볼 때 우리는 ‘보물’을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은 ‘사소함과 이기적인 비루함’을 솔직하게 느끼고 표현할 수 있어야만 가능하다.

또한 최근 <안네의 일기> 주인공 안네 가족이 숨어 지내다 바로 이웃 ‘유대인’에 의해 고발됐다는 정황이 알려졌다. 고발자는 그 밀고의 대가로 나치들 속에서 마지막까지 편히 살았다 하고. 그런 반면 독일의 사업가였지만 쉰들러처럼 유태인을 도왔던, 인간적인 행위를 한 사람들도 꽤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위기 상황을 만날 때 자신은 어떠한 모습을 하는지 스스로를 관찰해보는 것도 보물을 찾는 것이 아닐까.

질문하며 대화로 확장해가기

이런 질문도 해본다. 성경 속에 나오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과 달리 무리에서 이탈해 위험한 자리까지 간 양 한 마리는 왜 그랬을까? 이에 대해 이어령 교수는, 풀 먹이만 보지 않고 하늘의 구름과 지평선을 바라보며 걷다가 무리를 따라가지 못한, ‘다른 놈’이라고 말한다. 마치 <갈매기의 꿈>에서 보통 갈매기처럼 썩은 생선 먹이에 심취하지 않고 더 높은 비상을 위해 고민한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처럼 말이다. 그들은 바보 같기도 하고 이상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탁월한 면을 지닌 외롭고 황홀한 존재일 수 있다고 한다.

‘어리석은’ 양이라고 말하는 일반화 속에 다른 각도로 바라보고, 질문하며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삶에서 보물을 캐내는 일은 그리 힘겹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들에 비해 보물찾기를 방해하는 이들도 있다. 작가 C.S.루이스는 ‘나는 절대~’ ‘꼭’ ‘한 번도’라는 말을 자주 쓰는 사람을 ‘목표만 추구하는 사람, 삶을 굴레에 가두는 사람’이라 경계했다. 위대한 철학이 ‘말을 주고받는 대화’에서 시작된 것이기에(플라톤의 대화편), 자기 말만 하는 사람이나 자기를 치하해 달라는 사람과의 사귐에서는 얻는 것이 거의 없다고 한다. 심지어 묻고 대답을 기다리지 않거나, 듣고 다르게 기억하는 사람은 함께 하기 힘든 부류라고 단언한다. 그래서 일방적으로 말이 길어질 때는 ‘잠깐만’이라고 차단하면서 시간 낭비를 줄이고 이제 반박할 시간임을 알리라고 대화법을 제시한다.

또한 손윗사람들이 성장을 멈추며 거꾸로 나이를 먹어, 아랫사람들과 정신 연령이 비슷해질 때 대화가 어려워지며, 이때 내재하던 인격이 드러나 상대에게 ‘공격성’을 보이거나 ‘위선’으로 덮으려 한다. 이것은 일종의 ‘잔인’한 모습으로 ‘육욕보다 더한 악’의 모습이라고 지적한다. 위선은 신성모독으로 이어지고, 남에게 퍼붓는 공격은 상대의 마음을 죽음에 이르게 해 7계명보다 앞의 계명을 어긴다는 뜻이다.

대화의 정직성을 붙잡아라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늘 기쁨을 찾고 누리고 싶다면, 진짜 보물을 찾고 싶다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김진 정신과 전문의는 그의 저서 <그리스도인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에서 ‘대화의 정직성’을 강조하며, “자기의 잘못을 볼 수 있고, 인정하는 정직성을 발휘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라고 전제한다. 그러려면 의도한 말 외에 ‘자신도 모르게’ 나온 말까지도 자기에게 속한 것이므로 책임져야 한다고 한다. 또한 교회 안에서 마음에 없는 칭찬이 습관적으로 오가면, 사람들은 자신을 높이 평가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지만 독이 될 수 있음도 반드시 알아야 하는데 그 차이는 어디서 올까.

한 일에 대한 동기와 과정을 칭찬하는 것은 바람직하나, 결과에 대한 보상적인 칭찬은 점차 더 큰 보상이 있어야 움직이게 하므로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어 사람의 안으로 들어간 말이 어떻게 나오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성숙도를 알 수 있어, 부정적인 말이 들어갔을 때 잘 소화해내어 부정적인 면을 적게 나타내는지, 오히려 주변을 더 ‘암울하게 하는지’를 보라고 한다.

C.S.루이스가 그토록 원했던 ‘기쁨’, 그 보물을 찾는 삶을 방해받지 않고 누리고 싶다면 기억해 두어야 할 말들이다.

절제가 필요한 부분

기쁨의 보물을 찾아 누리려면 조바심을 내려놓아야 한다. 하나님보다 ‘내 마음 상태’에 더 집중해 삶을 ‘자기도취적인 사치’로 만들고 있지 않은지, 고통을 피하는 데에 초점을 둔 ‘현실 도피’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낭만주의적 성향’으로 기쁨을 얻으려 하는 건 아닌지.

또한 신앙생활에서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이 자랑거리가 되지 않음도 알아야 한다. 놀랍게도 기쁨은 소박한 삶 가운데 경이롭게 찾아온다는 것. 심지어 소소히 앓아눕는 날, 자신의 선량함을 느끼며 생육과 삶의 절박함, 오만까지도 바라볼 수 있었다고 C.S.루이스는 말한다.

철학자 단테가 ‘소박한 삶 가운데 진정함을 보고, 거기서 좋은 점을 찾을 수 있으니 그 점을 이야기하자’ 했듯이 말이다.

삶 가운데 느끼는 두려움, 무서움이 기도하게 하고, 성경도 읽게 하며, 양심을 따르게도 하는 것. 그러므로 기쁨, 보물을 찾는 대상은 그 맥을 잡으면 어디서나 가능한 것이다.

전영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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