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파 방정환의 교육철학 살펴보기
특집 : 아이랑 사랑하기, 살아가기

 

우리 교육, 그 버거움

몇 해 전 오랫동안 뉴질랜드에서 선교사로 일했던 가정이 귀국했다. 자녀는 고등학생 나이라 한국에서는 이름난 기독교대안학교에 진학했다.

그런데 자녀는 학교생활에 도무지 적응하지 못했다. 하루의 삶 모두가 ‘입시’를 위해 짜여 있기 때문이었다. 뉴질랜드에서는 점심 후 1시간 정도 운동할 수 있었는데, 한국에서는 부족한 과목 보충에 쓰고 있었다. 그 학생이 한국에 와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우리의 입시위주 ‘교육 시스템’이었고, 그것은 우리 다음 세대 모두에게 해당된다.

어릴 때부터 ‘입시’라는 버거운 짐을 지고 사는 자녀들. 우리는 그들에게 어떠해야 하는가.

방정환이 생각한 다음 세대 교육

가정의 달 5월의 첫 휴일은 ‘어린이날’이다. 소파 방정환을 통해 시작된 ‘어린이 운동’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 운동이 발화한 때는 일제강점기 초기였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탄당하고, 나라를 잃어버렸던 1910년. 교육에 있어 일제는 이때 조선인들을 차별했는데, 이유는 다름 아닌 ‘저급한 노동력 양산’이 목표였기 때문이다. 일본어를 가장 집중적으로 가르쳤고, 약간의 산수와 조선어 정도만 과목에 편성했다. 일제의 입장에서 조선인들은 똑똑할 필요가 없었다. 일차원적인 노동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교육이면 충분하다고 여겼다. 이때 일본에서 유학하고 고국에 돌아온 방정환은 그와 뜻을 함께하는 이들과 더불어 어린이에 대한 전혀 새로운 관점을 내놓았다. 단순히 교육의 대상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어른과 전혀 차이 없이 대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윤리적으로 그의 인격을 인(認)하야, 첫째로 언어에 있어 그들을 경대(敬待)하자.…(중략)…우리는 어린이의 인격을 인(認)하는 첫 표시(表示)로써는 먼저 언어에서 경대(敬待)하여야 한다. 둘째로 의복, 음식, 거처(居處), 기타 일상생활의 범백(凡百)에 있어서 어린이를 꼭 어른과 동격(同格)으로 취급(取扱)하는 습관을 지녀야 한다, 셋째로 가정․학교 기타 일반의 사회적 시설에 있어 반드시 어린이의 존재를 염두에 두어서 시설을 행하야 한다. 또한 그들에게 상당한 의식을 주어 자체가 영양불량의 폐에 빠짐이 없게 하며, 마지막으로 유소년의 노동을 금하고 일체로 취학의 기회를 얻게 할 일이다.

(김기전, “개벽운동과 합치되는 조선의 소년운동”, <개벽> 35호, 1923년 5월호)

어린이를 인격적으로 대하고, 존댓말을 사용할 것. 일상생활에서 어른과 전혀 차별 없이 대우할 것. 어린이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 시설을 구축해야 할 것. 또한 어린이들에게 노동을 금하고 취학의 기회를 얻게 하라는 것은 당시 일제의 교육정책에 전면으로 맞서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들 스스로가 어린이를 어떻게 대하고 있느냐에 있다. 그래서 방정환은 ‘어떤 교육을 하자’는 주장보다, ‘어린이를 존중해야 한다’는 교육철학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어린이는 결코 부모의 물건이 되려고 생겨난 것도 아니고, 어느 기성사회의 주문품이 되려고 나온 것도 아닙니다. 그네는 훌륭한 한 사람으로 태어나오는 것이고 저는 저대로 독특한 사람이 되어갈 것입니다 … 몇 곱의 위압과 강제에 눌려서 인형제조의 주형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는 중인 소년들을 구원하여내지 아니하면 안 됩니다. - 방정환

방정환은 어린이는 미성숙하고, 어른은 성숙하다는 도식을 완전히 거부한다. 또한 그는 ‘애녀석’, ‘어린애’, ‘아해놈’이라는 정상적이지 않은 칭호를 어른들 입에 달고 살던 사회 속에서 ‘어린이’라고 부를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 운동의 일환으로 <어린이>라는 잡지를 창간하기도 했다. 그는 어린이는 존재 그 자체로 존중받을 자격이 있고, 어른들이 그것을 이해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여겼다. 즉, 당시 방정환과 함께 했던 이들이 생각한 다음세대 교육은 다름 아닌 ‘어른 교육’이었던 것이다.

생각의 뿌리

다시 뉴질랜드에서 한국에 온 선교사 자녀를 소환하며 ‘기독교 교육’은 우리 사회의 다음세대들을 위해 어떤 교육철학을 제공하고 있는지를 반문한다. 더 나은 물리적 교육 요건을 갖추고, 더 많은 재정을 투입해서, 더 많은 아이들을 ‘입시’에 ‘성공’시키는 것이 목적인 것처럼 보이는 교육 현실 속에서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지.

어린아이들을 안고 안수하며 축복하셨던 예수, 그리고 어린아이와 같아지라고 회중에게 가르쳤던(마가복음 10장 13~16절) 그분의 뜻을 받들어야 할 것은 바로 어른이다. 어른들이 어린이를 자신보다 부족한 존재로 여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것, 그것이 다음세대 교육을 위한 첫 걸음이 아닐까? 방정환은 거기에서부터 시작했다.

민대홍 기자

 

저작권자 © 아름다운동행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