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에덴 이후에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네 동생이 어디 있느냐?” 가인을 향한 질문이지만 지금 우리에게도 생생하게 들려오는 소리입니다. 세상은 아픔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기적도 일어납니다. ‘미라클’, 아프가니스탄에서 우리 조력자로 살던 이들 391명을 국내로 이송한 작전명입니다. 구출된 이들은 자기들이 버림받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숨을 돌린 후에는 새로운 땅에 적응해야 합니다. 언어도 문화도 낯선 곳에서 산다는 것은 취약한 존재로 살아야 함을 뜻합니다. 그들의 시린 마음을 안아줄 따뜻한 손길이 필요한 때입니다. ‘네 동생이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 응답하려 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여전한 세상의 아픔
1979년부터 10년간 지속되었던 소련과 무자헤딘 간의 전쟁을 숙주로 하여 탄생한 탈레반은 2001년 9.11 사태 이후 미국의 주둔으로 세력을 잃은 듯 보였지만 이제는 엄연한 현실로 세계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이미 상당한 혼란이 빚어지고 있습니다. 테러와 공포가 일상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난민이 되어 세상을 떠도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주 노동자로 살면서 가족과 생이별한 채 지내는 이들도 많습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누리는 많은 것들이 다른 이들의 수고 덕분입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이제 농촌이든 어촌이든 이주 노동자들이 없으면 생산 활동을 하기 어려운 형편이 되었습니다. 계절노동에 동원되는 이주 노동자들은 비좁은 다인승 버스를 타고 이동하고, 비좁은 숙소에서 공동생활을 합니다. 의료혜택도 부족하니 감염병에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언어적, 신체적 폭력에 항시적으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애굽의 난민이던 이스라엘
성경은 세상을 떠돌며 살 수밖에 없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난민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더라도 그 시절을 잊으면 안 된다고 당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나그네를 학대하거나 억압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몸붙여 살던 나그네였다.”(출애굽기 22장 21절)
성경은 학대당하는 이들이 정의를 호소하며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신다고 말합니다.

요구에 대한 응답이 ‘인간성’
‘인간 존재는 인간 되어감이다’(야스퍼스).
‘인간(human-being)의 과제는 인간이 되는 것(being-human)이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요구받음에 대해 어떻게 응답하느냐가 우리 인간성을 결정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일지, 정답을 제시할 수는 없지만 방향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이웃을 위해 존재한다. 무엇보다 그 미소와 안녕에 우리의 행복이 오롯이 달려 있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친분은 없지만 공감이라는 끈으로 서로 얽혀 있는 미지의 타인을 위해. 나는 하루에도 수백 번씩, 나의 온 삶이 산 자든 죽은 자든 상관없이 타인의 노동에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그리고 내가 받은 만큼을 돌려주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도 기억한다.”(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나는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호메로스)

‘우리는 이웃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한 아인슈타인의 고백이 놀랍습니다. 인간의 과제는 받은 만큼 돌려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는 그의 말이 인상적입니다. 우주의 신비와 비밀을 탐구하는 최고의 과학적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 결국 곁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게 마련입니다.
바울 사도의 말씀도 같은 진실을 보여줍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고린도전서 13장 2절)

지근거리에 있는 이들을 아끼고 존중할 줄 모른다면 그는 진리 안에 거하는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일상은 그런 사랑을 배우고 익히는 도량입니다. 우리들이 맺는 관계 속에서 주님의 사랑이 나타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익에 담백해질 때 우리 속에 여백이 커집니다. 여백이 있어야 다른 이들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갑작스런 소낙비가 내린 후 하늘이 청명합니다. 깨끗한 대기는 사물들을 왜곡됨 없이 보여줍니다. 우리도 삶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빛을 받아 환히 열린 미래를 봅니다.”(시편 36편 9절)

김기석
청파교회 담임목사. 문학적 깊이와 삶의 열정을 겸비한 목회자이자 문학평론가이다. 그는 시, 문학, 동서고전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진지한 글쓰기와 빼어난 문장력으로 신앙의 새로운 층들을 열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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