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라는 큰 돌림병으로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사회적 거리두기’ 지침에 따라 견디기 어려운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마음껏 돌아다니며 어울렸던 이전의 시간을 동경하는 회귀의 갈망은 날로 거세집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 제약 없이 모여 함께 찬송하고 기도하고 설교를 듣고 사귐을 다졌던 그때를 그리워합니다. 교회의 ‘예배 공동체다움’에 헤살을 놓는 현실을 순순히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공동 예배’는 다른 종교에서는 찾을 수 없는 특유의 집합 의례로서, 기독교의 역사와 함께 해온 양도할 수 없는 신앙 전통이자 습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배당에 한 자리에 모여 예배드리는 그 날이 오기를 마음 깊이 열망합니다.

‘도구’가 ‘목적’의 자리에 앉아 호령
나는 사회학도로서, 오래 전부터 우리 사회가 두 가지 조직 원리로 움직인다는 논지를 펴왔습니다. 하나는 경제 성장의 논리에 휘둘리는 ‘경제주의’와 다른 하나는 가족단위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가족주의’입니다.
사람이란 어쩔 수 없이 의식주를 비롯한 ‘물질’에 에워싸여 사는데, 이 물질이란 것이 ‘조건’(도구)의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목적’의 자리로 올라서서 삶 자체를 호령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도구’이어야 할 이 ‘조건’이 모두가 지향해야 할 삶의 궁극 목표가 되고 삶의 성패를 가르고 재는 최종 기준이 되었습니다. 모두 이 ‘조건’의 노예로 사는 모양새입니다. 이것이 ‘경제주의’의 모습입니다.
또, 핏줄로 묶는 가족의 중요성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문명권이 다 강조해 왔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우리가 남이가’, ‘우리집안 잘 살아보세’ 하며 좁은 결속의식을 끌어들여 경제발전에 한 몫 하기도 했습니다. ‘가족주의’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원리는 혈연에 터한 가족/친족 공동체의 배타성이 허물어져, 유대인과 이방인, 종과 자유인, 남자와 여자가 따로 없는 것입니다. 우리 조선 사회에서도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양반과 상민 사이의 불평등이 질문을 받았고, 남자와 여자의 차별 또한 허물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가 그렇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자랑하기 부끄러운 부흥의 안쪽
그러나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는 기독교의 영향을 내세우기 매우 부끄럽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화려한 ‘발전상’ 그 안에 가려진 추잡한 탐욕의 괴물들이 우글거리는 현상 속에 오늘의 교회와 기독교인이 ‘책임 없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오히려 ‘책임 있다’는 쪽입니다. 나/우리만 잘 살면 된다는 비좁은 이기주의자들, 이웃을 생각지 않는 자기 본위의 편협한 사람들이 삶의 표준이 되고 이들의 지향성이 삶의 규범이 되어, 비정하고 무정한 사회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교회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습니다. 한국 사회의 됨됨이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초월 신앙’ 향한 감수성 회복은…
물질의 부를 삶의 목표로 믿고 어떻게 하면 자기/집안이 ‘잘’ 살 수 있을까 발버둥 치며 이를 위해 기도하는 좁다란 삶의 지향성에 맞서야 합니다. 달리 말하여, 삶의 도구를 삶의 ‘목표’ 아래 두고 다스리는 삶의 지향성, 자기/집안 중심의 지평 그 너머 이웃에 대한 관심을 지니는 ‘이웃됨’의 지향성을 일러주고 마련해주어야 합니다. 이 길은 현존 질서와 동일시할 수 없는, 동일시해서는 안 되는 초월 신앙에 대한 감수성의 회복을 가리킵니다.
기독교의 초월 신앙은 현존하는 것의 절대화를 거부합니다. 현존하는 것 그 모두가 인간의 산물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참 믿음의 사람은 기존 질서와 긴장하고 갈등하고 대립하고 대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녀야 합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는 ‘이 땅’에서 말하는 ‘나라’, ‘의’와 동일시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되살핌과 되새김을 건너서
어두운 코로나의 골짜기에서 이 땅의 교회, 내 신앙의 모습을 생각합니다. ‘말씀’에 비추어 건강한가, 코로나보다 더 큰 질병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묻습니다. 이 땅의 도성에서 거둔 성공과 부흥과 융성과 풍요, 그 ‘자랑’의 밑바탕을 제대로 살피고 새깁니다.
우리가 들어선 이 코로나의 생활은 자기 점검을 위한 회개의 기회입니다. 깊이 깨우쳐 새김질할 값지고 소중한 도전의 시간입니다.
그냥 지난날로 돌아가는 것이 능사라고 하지 못합니다. 코로나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은 어제의 그 상황과 공간으로 단순 복귀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심장을 두드리는 하늘의 소리에 화답하며, 되살핌과 되새김의 기회를 얻게 된 은혜에 감사하면서 거듭난 믿음의 사람으로 함께 순례자의 길을 떠나야 합니다.

박영신
사회학자. 평생 연세대학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친 명예교수로 녹색연합 상임대표를 지냈으며, 현재 (사)녹색교육센터 이사장, 재단법인 목민 이사장 등을 맡아 생명의 소중함을 널리 알리고 후학들을 키우는 데 힘쓰고 있다.

저작권자 © 아름다운동행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