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유연함'에 대하여

아토피가 찾아왔다
작년부터 급작스레 생긴 성인 아토피로 일 년 넘게 고생 중이다. 각종 화학물질이나 환경호르몬에 예민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라는데, 그로 인해 일상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코로나19가 가져온 일상의 멈춤보다 훨씬 더 가까이 체감되는 변화다. 일단 가공식품은 뭐든 먹을 수가 없다. 아주 작은 분량으로라도 화학첨가물이 들어 있기 때문인데, 그동안 그만큼의 ‘이질적아토피가 찾아왔다
작년부터 급작스레 생긴 성인 아토피로 일 년 넘게 고생 중이다. 각종 화학물질이나 환경호르몬에 예민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라는데, 그로 인해 일상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코로나19가 가져온 일상의 멈춤보다 훨씬 더 가까이 체감되는 변화다. 일단 가공식품은 뭐든 먹을 수가 없다. 아주 작은 분량으로라도 화학첨가물이 들어 있기 때문인데, 그동안 그만큼의 ‘이질적인 물질’을 내 몸이 순순히 받아들여 준 것은 건강함이었을까, 넉넉함이었을까?
“네가 예민해서 그래. 마음먹기에 달렸는데, 마음을 좀 여유롭고 넉넉하게 가져 봐라. 매사 유연하게 대처하고”, “50이 넘어서도 그렇게 늘 긴장하고 사니까 그렇지. 뭘 그렇게 종종거리니?”라는 가족들의 평가. 아, 내 탓인가? 불과 1년 전까지 편히 입고 편히 먹고 편히 앉고 편히 쉬던 일상의 것들이 이제는 모두 ‘항원’이 되어버린 것이 내 몸 탓인 것은 맞다. 면역학에서 ‘항원’이란 그야말로 내 몸을 교란시키고 공격하는 이질적인 물질로, 이에 저항하여 ‘항체’를 만드는 과정에서 면역시스템이 무너지면 지금 내가 겪는 이상 반응들이 나타난다고 한다.

유연함이란 뭘까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라 하니 불가능한 스케줄 가운데서도 짬짬이 누워 생각에 잠긴다. 그럼 내 몸은 왜 이렇게 되었지? 정말 내 병인이 고지식함, 까다로움, 원칙주의, 완벽주의 때문일까? 그렇다면 치료는 ‘유연함’을 가지는 생활 태도인가? 그런데 유연함이란 뭐지? 그것이 부드러움(softness)을 의미한다면, 다소 억울하다. 난 자타가 인정하는 매우 ‘부드러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인지, 후천적으로 훈련된 것인지는 몰라도 첫딸에, 목회자의 딸로 자라는 동안 나와 이질적인 것을 받아들이고 대응하는 ‘처세’에 있어서는 언제나 부드러웠다. 나와 다르다는 것이 ‘틀림’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꼭 내 선호도나 방식대로 일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도 없지 않은가! 하여 나는 늘 ‘부드럽게 맞춰주는’ 사람이었다. 음식 메뉴 결정, 만남, 의사결정의 경우 주장이 강한 사람에게 부드럽게 맞춰주었다.

하지만 ‘부드러움’이 언제나 타인에게 맞춰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표현방식이나 말은 조곤조곤 부드러워도, 한 치도 자신의 입장을 양보하지 않는 사람들을 꽤 많이 만나왔다. 그러니 ‘유연함’의 동의어가 ‘부드러움’은 아니지 싶다. 몸이 유연한 것과 성품으로서의 유연함은 다르지 않나. 누군가의 사고나 처신이 ‘유연’하다면, 일단 그건 자신의 답과 생각에 기준이 있음을 전제로 한다. 유연함이 우유부단함, 어찌되어도 상관없음, 좋은 게 좋은 것임 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테니.

그게 유연함은 아니다
그럼 성품으로서의 유연함이란 ‘융통성(flexibility)’에 더 가까운 것일까? 나에게 확고한 신념이나 원칙이 있지만 공동체 안에서 일이 진행되도록 융통성 있게 적정선에서 타협이나 조화를 도출하는 태도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성과’를 위해 나의 원칙을 유연하게 조정하는 것에도 질문은 따른다. 도대체 어느 선이 ‘적정선’이지? 어디까지 융통성을 발휘해야 하지? ‘적폐’라는 현실 앞에서는 더더욱 묻게 되는 질문이다. 조직 생활을 하는 동안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융통성’이 없다는 평가였기 때문이다.
내가 그렇게 꽉 막히고 고지식한 사람인가? 하지만 수년의 고통 끝에 깨달은 것이 있다. 오히려 많은 사람이 오래오래 누적되어왔던 잘못된 습속(적폐)에 동조하거나 최소한 눈감아주는 것을 ‘융통성’이라고 부르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건 융통성이 아니다. 유연함도 아니다.
요즘 가장 많이 들리는 ‘내로남불’은 그래서 발생하는 거다. ‘우리’ 공동체에는 너무나 너그럽게 작동하지만, ‘적’을 향하여서는 엄격해지는 잣대는 결코 ‘유연한 잣대’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습속과 기준은 유연함과 거리가 멀다. 굳어있음이다. 불통이다. 그야말로 ‘적폐’이다.

그래, 유연함이란…
결국 유연함이란 ‘흐름’이 있어야 한다는 말인 것 같다. 내 존재에 ‘너’를 감지하고 받아들이고 이해할 힘과 통로가 있어야 한다는 말인 것 같다. 혈루병 걸린 여인이 예수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 자기에게서 치유의 힘이 나간 것을 아신 예수처럼 그렇게 ‘흐름’을 포착하는 민감성과 이를 사랑과 정의의 원칙으로 살펴 인정하는 것을 ‘유연함’이라 불러야 할 것 같다. 피 흘리는 여인은 부정하다는 유대 율법적 가르침, 여인이 동의 없이 모르는 남자의 몸에 손을 대는 부도덕함, 이런 것들을 섣불리 판단하기 전에, 내 몸 안으로 들어와 느껴졌던 여인의 아픔과 상처, 그리고 그에 반응하며 치유의 힘으로 전달된 예수님의 능력, 그 ‘흐름’이 진정한 유연함이 아닐까?

그렇다면 유연함은 언제나 상호적이어야 한다. 힘없는 자가 일방적으로 힘 있는 자에게 맞추는 것도 아니요, 성격 좋은 사람이 까칠한 사람에게 베푸는 너그러움도 아니다. 나와 동질의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너그럽고, 이질적인 사람들에게는 딱딱한 태도 역시 유연함과는 거리가 멀다.
유연함은 오히려 치열한 ‘상호 부딪힘’을 위한 전제 조건이다. 유연해야 너의 의미가 내게로 온다. 유연해야 나의 의미가 네게로 간다. 성경 안에서 유연함의 반대말을 찾으라 한다면 나는 ‘강퍅함’이라고 생각한다. 바로의 강퍅함처럼, 자기의 생각과 다른 이질적인 것을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 그 유연하지 못함이 결국 반 하나님적인 선택을 하도록 만들지 않았나!

다시 돌아가 나의 최근 병을 묵상해본다. 아주 소량의 이질적인 것에도 온몸으로 반응하는 나는 유연하지 못한 사람인지. 어쩌면 이제야 비로소 나의 의미를 밖으로 표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치열한 ‘상호 부딪힘’을 위하여, 그 마주함 가운데 생명의 흐름을 얻어내기 위하여.

백소영
강남대 기독교학과 교수. 다양한 문화현상들을 그녀만의 따뜻한 시각으로 분석한 강의와 글쓰기로 기독교세계관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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