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유연함'에 대하여

딱딱함이 지켜주지 못하는 시대
예쁜 벽돌, 그 벽을 타고 자라는 담쟁이넝쿨, 중앙에 멋지게 건축된 도서관과 운동장. 학교를 생각하면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다. 그 이미지가 가리키는 것은 곧 ‘건축물’이다. 우리 사회에 소위 근대식 교육이 시작되면서 어린이와 청소년이 학교에 간다는 것은 ‘건물로서의 학교’를 의미한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해 학교가 폐쇄되거나 출석 통제가 이루어져 학교 교육에 대한 인식이 바뀌게 되었다.
2020년 8월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학교가 문을 닫음으로써 취약계층 아동·청소년들이 교육 기회를 상실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유엔은 2021년에 2,400만 명의 어린이·청소년들이 학교를 떠나게 될 것이라며, 학교 폐쇄로 인해 교육 기회를 상실함과 동시에 급식 중단에 따른 영양실조 문제, 가정폭력의 문제가 악화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사실 과거 학교는 이러한 문제들을 막는 보호막 역할을 했었다. 학업성취도의 차이는 물론 존재했지만, 한 공간 안에서 같은 책·걸상에 앉아 수업을 받고 같은 시간을 보내는 것. 그리고 때가 되면 함께 밥을 먹는 행위 등을 통해 많은 것들이 보호되고 지켜져 왔다. 마치 튼튼하게 지어진 집이 외부 위협으로부터 가정을 보호하듯이 말이다.

새로운 교육환경, 새로운 인간
우리 교육에 온라인/비대면이라는 새로운 방식이 도입되었다. 물론 이전에도 사이버대학이나 방송통신대학 등 온라인으로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지만, 그것은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 이제는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뿐만 아니라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도 비대면 교육을 한다. 또한 종교기관, 특히 모임 횟수가 다른 종교에 비해 월등히 많으며 ‘교회학교’라는 교육 시스템을 운영하는 기독교도 온라인/비대면 예배와 모임을 갖는다.
이러한 교육환경의 변화는 교육의 방법과 콘텐츠도 전폭적으로 바꿀 것을 요구한다. 기존의 방식대로는 교육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교사가 어떤 콘텐츠를 가지고 있느냐가 교육의 질을 결정했다면, 이제는 학생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매우 중요해졌다. 근대식 교육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 교육계가 오래도록 연구하고 발전시켰던 ‘자기주도학습’이라는 것은 온라인 시대에는 필수가 되었다.
이런 환경의 변화는 근대식 교육과 그 교육이 지향하는 목표를 전면적으로 수정하게 한다. 소위 근대식 교육이란 ‘전문인’을 기르는 과정이었다. 우리 사회가 유지·발전되는데 필요한 수많은 지식과 기능을 각자의 재능에 따라 골고루 나누기 위한 과정 말이다. 한 사람이 모든 것을 할 필요가 없고, 자기 분야에서만 최선을 다하는 것. 분업은 산업화와 대량생산 시대에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교육환경과 새로운 인간상이 요구되는 시대를 맞이했다. 교육학자 황규호 교수(이화여자대학교)는 “4차 산업혁명 시대, AI시대로 불리는 미래사회에서는 AI가 교사를 대체하게 된다는 극단적인 전망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교수학습의 방법 면에서 다양한 기술이 활용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때 필요한 것은 “그 시대를 살아갈 학생들에게 길러주어야 할 능력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를 길러주기 위해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를 확인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일”이라고 설명한다(“포스트코로나 시대 국가교육과정의 과제”, <교육과정 연구>, 2020.12).
‘새로운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핵심이다. 따라서 교육계에서도 새롭게 대두되는 키워드들이, ‘융합’, ‘창의’, ‘소통’이다. 타인, 타국, 타문화와 연대하고 소통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극복할 수 없는 코로나19 시대는 융합적, 창의적 사고를 하는 주체들이 서로 소통하는 것으로서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유연함이 세상을 지키는 시대가 도래했다.

스승과 제자가 있으면 어디나 학교
우리 역사 속에서도 교육의 위기, 삶의 위기들은 있었고, 조상들은 나름의 노력으로 그 시대를 이겨냈다.
조선시대에 교육기관은 대표적으로 두 곳을 볼 수 있다. 유생들을 길러내는 국가교육기관인 성균관과 향촌 교육기관인 서당이다. 그러나 조선은 ‘양란’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향촌 교육이 거의 불가능한 수준으로 훼손되었다. 이를 재건하는 과정 중에, 어린 유생들을 어떻게 길러낼 수 있었을까?

“동몽학(童蒙學)은 옛적에 어린이를 가르치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근자에 학교가 폐이(廢弛, 문란해지다)하여 과부의 아들이 능히 배우지 못하고, 또 비록 부형이 있어도 공부하지 않고 있음으로 공부시킬 방도가 없습니다. 청컨대 옛 법을 거듭 밝혀서 동몽학을 세워 배울 수 있는 길을 넓히소서”(중종실록, 1506)
조선 전기에 신세호라는 인물이 임금에게 간언한 내용이다. 교육학자 김경용(한국교원대학교)은 “서당이나 서재 등에서 공부할 수 없었을 때는 누정(樓亭, 누각이나 정자), 암자, 사적·고적 등에서 교육을 했다”는 내용을 연구했다(“조선 전기 서당교육에 대한 시론”, <교육사학 연구>, 2017). 즉, 조선 전기 때부터 교육에 대한 유연한 사고를 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어 있었고, 양란 후 완전히 피폐해진 가운데서도 스승과 제자가 있다면, 그곳은 어디든 학교가 될 수 있었고, ‘온당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번듯한 건물이 없으면 암자에서, 혹은 사찰에서 공부할 수 있었고, 스승의 집도 학교가 되었다. 수직적이고 법과 질서를 중요하게 여겼던 유교적 조선 사회에서도, ‘교육’의 중요성은 인식하고 있었고, 위기에 대해 상당히 유연한 대처를 했음을 알 수 있다.

오늘, 우리는 딱딱함과 유연함의 경계를 걷고 있고, 코로나19는 그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게 하고 있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라 하였는데,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살아갈 다음 세대들이 유연함으로 보호되고 길러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융합’, ‘창의’, ‘소통’의 능력은 딱딱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근대식 교육으로는 길러지기 어렵다. 위기의 순간에 ‘관계’를 중심으로 새로운 교육판을 짰던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오늘 우리 현실에도 적용해보자. 내 역할에만 천착하는 기능인이 아닌, 두루 생각할 줄 알고, 소통할 줄 아는 유연한 다음세대를 위하여.

민대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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