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유연함'에 대하여

죽은 모든 것은 딱딱하다
일본 청년 ‘테라오 겐’이 창업한 기업 발뮤다에서 놀라운 기계를 출시했는데, 그것이 바로 ‘발뮤다 토스터기’이다. 이 토스터기가 유명한 이유는 빵을 굽기 전 상단의 트레이에 물을 부어 굽는데, 굳어버린 식빵이 촉촉하면서도 바삭한 토스트로 재탄생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발뮤다의 테라오 겐 대표가 비가 쏟아지는 캠핑장에서 숯불에 구워 먹은 빵의 맛을 잊지 못해 개발했다고 한다.
당시 토스터기를 출시할 때의 홍보문구가 신선했다.
“우리는 죽은 빵도 다시 살린다”

그렇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부드럽고 유연하다.
그러나 모든 죽은 것은 거칠고 딱딱하다.
어찌 식빵만 그럴까? 삶도, 사람도 그렇다.

편견과 아집으로 굳어진 생각은 거칠고 딱딱해 쓸모가 없다. 편견과 아집이 지나간 자리에 갈등과 반목만 준동(蠢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삶의 공간을 거칠고 딱딱한 폐허로 만드는 편견과 아집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들의 기원은 ‘자신만 옳다(self-righteousness)’고 확신하는 독선(獨善)이다. 독선의 위험성은 자신과 다른 모든 의견을 거부하는 폐쇄성(閉鎖性)에 있다. 즉 자신과 다른 것에도 문을 개방할 줄 아는 ‘유연성’이 철저하게 차단되어 있다. 유연성이 결여된 사람은 자신의 삶을 ‘굳어버린 식빵’으로만 살게 한다. 따라서 육체의 노화(老化)보다 무서운 것은 생각이 ‘고집’(固執)으로 굳어버리는 ‘정신의 노화’이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권력
기원전 6세기에 아테네 통치자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아테네 축제에 참여하던 중, 그의 딸을 흠모하고 있던 한 시민이 공주를 보고 감격하여 두 팔로 그녀를 끌어안는 불미스런 사건이 발생한다.
이 광경을 목격한 왕비는 분노하여 “무례한 자의 두 팔을 잘라 공주의 수치를 갚아달라”고 페이시스트라토스에게 호소한다. 그때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왕비에게 이렇게 말한다.
“왕비여, 우리를 사랑하는 자를 벌(罰) 준다면 우리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상(賞)을 주란 말이요?”

그러나 그 시민의 행위를 없는 일로 취급할 수 없었던 페이시스트라토스는 피고가 된 그 시민에게 “잘못은 네 두 손이 했으니, 너의 두 손으로 네 뺨을 두 번 치라”는 판결을 내린다. 잘못에 대한 ‘책임’은 묻되 잘못에 대한 ‘분노’는 알맞게 조절했던 페이시스트라토스, 곧 고대 그리스인들이 가장 귀하게 여긴 ‘메덴 아간(그리스어, 무엇이든 지나치지 않게 하다)’을 실천한 그는 이후 아테네 시민으로부터 절대적 신임을 받게 된다.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권세는 칼과 군마(軍馬)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런 권력은 설령 자신과 다른 삶의 방식과 마주쳐도 ‘배척’과 ‘대립’이 아닌 보듬고 아우르는 넓은 품성, 곧 ‘유연함과 부드러움’에서 비롯된다.

코르 젠틸레
‘코르 젠틸레’는 중세 수도사들이 하루 시작에 드리는 첫 기도였다. 라틴어 ‘코르 젠틸레(Cor gentile)’는 ‘심장(Cor)이 부드럽다(gentile)’의 뜻으로, 중세 수도사들은 세속의 악함을 목격한 후 분노로 흔들리는 자신의 뒤틀어진 영성을 ‘미세조정’하기 위해 하루의 첫 기도를 ‘주여, 온유한 심장을 주소서’라고 탄원했던 것이다. 중세 수도사들은 ‘부드럽고 유연한 심장’을 의미하는 ‘코르 젠틸레’가 얼마나 아름다운 권력인지를 알았다. 기원후 4세기 사막교부였던 안토니우스는 이런 글을 남겼다.

“온유는 ‘진리로 자신을 죽여본 자’만이 획득할 수 있는 품성이다. ​온유는 악인을 비판할 충분한 자격을 자신이 하늘로부터 허락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 자만이 소유할 수 있는 보석이다. ​온유는 용서받은 은총을 늘 심장에 품고 사는 자만이 행사할 수 있는 매우 특별한 힘이다. 따라서 온유는 어른이 된 자에게서만 발견되는 ‘희귀한 태도’이다.”

이 시대는 분명 분노사회이며 조급함의 시대이다. 너무들 쉽게 분(忿)을 내며 모두들 너무 쉽게 성급하다. 따라서 ‘잠깐’이라도 참아줄 줄 모르고 ‘조금’이라도 기다려줄 줄 모른다. 그 결과 감정에 ‘쉼표’가 없고 표정에 ‘아다지오(Adagio, 매우 느리게)’가 없는 사막을 산다.

예수 그리스도 - 벽과 담을 허무는 자
길 가에서 돌을 주운 사람 중 어떤 사람은 그 돌로 ‘담’을 쌓아 서로를 ‘분리’시키지만, 어떤 사람은 그 돌을 모아 ‘다리’를 만들어 서로를 ‘결합’시켜준다. 생각과 품성이 ‘여유로움’으로 채워진 사람은 결코 ‘담’을 쌓지 않는다. 그 ‘담’은 서로를 용납하지 않고 대적하겠다는 선전포고(宣戰布告)를 함의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야만스런 ‘담의 문화’를 거절하셨다. 그 증거가 십자가 사건이다. 십자가 사건은 의인과 죄인, 유대인과 이방인,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심지어 남자와 여자 사이에 군림하던 이 ‘세상의 담’을 허물어 버리는 획기적 사건이었다.

그 결과 담과 울타리가 사라진 여유로운 예수의 세계는 그 누구의 방문도 기꺼이 환영을 받았고, 그 어떤 자의 입장도 거절 없이 허락되었다.
따라서 로마의 앞잡이로 돈과 권력을 위해 질주하던 세리장 삭개오와 세리 마태가 ‘예수의 세계’에 입장할 수 있었고, 현장에서 간음을 하다가 발각되어 예수 앞에 끌려온 현행범 여인도 추방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했던 실패자 베드로, 그리스도교를 박멸하고자 혈안이 되어 분주하던 사울이란 청년이 예수의 세계에 입성할 수 있었던 것도 다름 아닌 생명의 존재로 예우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유연한 태도’가 있었기에 가능한 선물이었다.

문(門), 닫아만 놓으면 ‘감옥’이다
닫아만 놓은 문은 ‘감옥’이다. 따라서 삶과 생각이 지나치게 닫혀만 있으면 그것은 스스로 수감(收監)된 죄수로 사는 것과 다름없다. 삶과 생각을 활짝 열린 문으로 만들 때 아름다움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굳어버린 심장이 사망선고의 근거가 되듯, ‘유연한 심장’은 ‘지금 살아있음’을 증명해주는 가장 확실한 표식(表式)이다.

그대의 심장,
그리고 삶의 태도,
지금 여전히 유연한가?

김겸섭
성경해석 연구 공동체인 아나톨레와 문학읽기 모임인 레노바레를 만들어 ‘성서와 문학 읽기’ 사역을 하고 있으며, 현재 서울 방화동 한마음교회를 섬기고 있다. 저서로 <천사는 오후 3시에 커피를 마신다>, <사랑이 위독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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