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거울아, 거울아 - 신학자이자 유학자에게 듣는 나르시시즘 극복 방안

우리 안의 나르시시즘을 진단하고,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을지를 듣고자 신학자이면서 동시에 유학자인 배요한 박사(신일교회 담임목사·사진 아래)를 만났다. 배요한 박사는 학부 시절 ‘동양사상 연구회’라는 동아리 활동을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공부는 목사가 된 이후에도 이어져서 유학과 기독교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다.

“교회 안에서 자랐고, 신학을 공부한 목사이지만 일반대학에서 ‘유학’을 공부하면서 내 안에 나르시시즘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기독교 세계 안에서만 생각하고, 그 세계가 전부라고 생각했었지요. 그러나 유학도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교회와 신앙을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교회는 사람 수나, 건물의 크기, 재정의 정도를 가지고 평가하는 곳이 아니지요. 교회의 양적인 성장과 부흥의 모습은 교회의 본질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는 그러한 가치가 나오지 않거든요. 내면에 충실하고, 건강해지는 것이 더 중요하지요”라는 말을 전한다. 즉, 스스로의 겉모습에 도취된 나르시시스트가 아닌 내면이 충실해야 한다는 것.
그렇다면 어떻게 그 겉모습을 넘어 내면을 성찰할 수 있을까?

내면을 성찰하기 위하여
“유학을 공부하면서 논어, 맹자, 도덕경 등을 연구했습니다. 그런데 성경과 겹치는 내용이 생각보다 많아서 놀랐습니다. 그리고 유학 서적들을 읽다가 보니 기독교에 너무 익숙해 있어서 놓쳤던 본문들의 가치가 드러났습니다. 성경의 가치를 역설적으로 더 폭넓게, 그리고 깊이 있게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만 보는 것이 아닌, 타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배 박사는 이것을 “물고기가 물에 대해 잘 모른다”라는 예를 들어 설명한다. 물 밖에 있을 때라야 비로소 물이 무엇인지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교회 밖에서 비기독교 지성인들, 일반적인 대학생들,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오히려 교회를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역설을 경험했다고 한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느꼈던 것입니다. 미국은 기독교 배경의 나라라 사회 전반에 기독교적인 요소들이 많고, 이민자들을 통해 불교, 이슬람교, 유교, 힌두교 등 다양한 종교가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반대입니다. 무교·불교·유교가 수천, 수백 년 영향을 주던 토양에 기독교가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유학을 공부한 것은 바로 내 속을 들여다보는 일이었습니다. 기독교인이기 전에 한국인으로서의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알게 해준 것이지요.”
타국에서 공부하면서, 그곳과 우리 문화 배경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또한, 기독교 목사이지만, 유학을 공부하면서 자신의 내면을 더 깊이 있게 본 그의 경험이, 오늘날 우리가 내면을 성찰하는데 좋은 본보기가 된다. 그에게 유학은 타종교 연구 차원을 넘어 자신이 선 땅, 그리고 자신의 내면을 객관화하며 성찰하는 것이었다.
타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볼 때, 자신의 내면에 더 가까이 접근하며, 본 모습을 직면할 수 있다는 깨달음은 새로운 시각으로 모든 것을 보게 한다. 바로 나 자신을 온당히 인식하게 하는 도구로 말이다.

수기치인, 나를 넘어 더불어 살기
“유학을 공부하면서 매력을 느낀 여러 개념 중에 수기치인(修己治人)이란 것이 있습니다. 나를 수양하고, 다른 사람들과 조화롭게 산다는 뜻입니다. 유교에서 가장 경계하는 것은, 수양은 게을리 하면서 과거에는 급제하고, 정5품 벼슬을 달아 남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나라를 태평성대로 만들기 위한 선한 동기로 시험을 보게 하고, 벼슬도 하게 하는 것이지, 장원급제나 벼슬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입신양명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는 것입니다.”
유학자가 유학의 본래 가르침과 동떨어져서 입신양명하는 것에만 열을 올릴 때, 벼슬을 하고 부귀영화를 얻는 등 겉모습은 화려해질 수 있지만, 태평성대의 뜻을 이루는 것과는 거리가 생기게 된다. 유학자에게 이것이 바로 나르시시즘이며 내적 빈곤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의 역할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자신이 복 받는 것에만 관심을 둘 때, 텅 빈 강정이 된다. 소위 ‘고지론’이라 불리는 것에 집착하며 예수 믿어 더 높은 자리에, 더 많은 경제적 부를 누리는 것을 추구하는 행동들은 본래 기독교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이어 배 박사는 퇴계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유학자로서 그가 지향했던 가치가 무엇인지를 설명했다.
“퇴계는 유교적 조선 사회 속에서,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라도 가르쳤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일찍 홀로된 며느리를 재가시키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친한 친구의 딸이었는데, 아들이 죽은 뒤 퇴계가 며느리를 재혼시키려 하자 오히려 아버지인 친구가 펄쩍 뛰었답니다. 그러나 유학도 인간의 행복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느 날 우연히 한양에 가던 길에 하룻밤 묵게 된 집에서 밥을 먹는데, 입맛에 맞고, 버선도 매우 편안했습니다. 퇴계는 그 집이 며느리가 재가한 집임을 알게 됩니다. 다음 날 집 주인에게 ‘나에게 음식을 주고 버선을 삼아준 사람에게 꼭 감사를 전해달라’는 말을 남기고 떠납니다.”
그 누구보다 유학에 충실한 사람이었지만, ‘사람의 행복’에 더 관심을 둔 퇴계의 삶과 사상이 돋보인다.
“교회가 본질을 회복한다는 것은 이웃과 더불어 행복해지는 것이라고 봅니다. 수기치인은 곧 교회와 이웃으로 연결됩니다.”
겉모습에 사로잡힌 나르시시즘을 극복하고, 수기치인의 가치가 우리 모두에게 회복되기를 바라본다.

민대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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