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거울아, 거울아 - 부모의 최적 나르시시즘?

‘금쪽이’가 태어났다. 아이의 첫 호흡이 시작되고 부모의 감탄사가 시작되면서 일반적인 현상에도 말할 수 없는 우주적 감동을 경험한다. 사랑한다 고백하고, 미안하다 울먹이며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꿈을 꾼다. 그렇게 부모는 신중해지고, 아이의 모든 것을 사랑으로 마신다.
어린이집재롱잔치에서 앞줄에만 서도 특별함이 느껴지고, 학교에 입학하고 남다른 똘똘함을 보인다 싶으면 부모는 우월의 DNA를 찾아내어 연결 짓는다. 반장 임명장이라도 받아오는 날엔 시대의 리더를 알리는 징소리가 들리고, 아이가 상위성적을 받아오는 날엔 부모 심장은 좌심방과 우심실을 중심으로 폭발적인 박동이 울려퍼진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경험하는 이 감정, 나르시시즘의 부활이다!

분산되었던 에너지가 아이에게
나르시시즘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오해는 좀 풀어야 한다. 나르시시즘, 즉 자기애는 안전감과 자존감을 유지하는 본질이라 성격발달에 필수적이다. 다만, 자아도취가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준으로 사용된다면 BTS가 부른 ‘Love Yourself’처럼 스스로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타인을 품을 수 있는 성숙한 낙관주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야말로 ‘외동시대’에 아이들은 ‘금쪽같은 내 새끼’ 그 이상이 되었다. 가장 좋은 것, 최고의 것으로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키며 황녀와 황태자로 키우는 세상이 되었다. 자녀를 귀하고 아름답게 키우려는 욕망이 나쁜가? 꼭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자신의 성장 그 이상의 환경과 성장 콘텐츠를 갖고자 하는 요즘 부모들의 원대한 소망은 숭고하기까지 하다.

부모의 병리적 나르시시즘
다만 부모들의 이러한 소망이 정상성과 비정상성의 연속선상에 있을 때 부모 병리적 나르시시즘은 시작된다.

먼저, 부모 나르시시즘은 먼저 ‘과장’으로 나타난다.
규칙과 일관성은 없으나 좋은 부모노릇을 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 ‘보여주기식 양육’을 하여 사실상 아이는 늘 정서적으로 방치되고 건강한 부모반영(mirroring)을 받지 못한다. 누구나 잘 보이고 싶고 뭔가 잘 되는 것처럼 착각도 하고 싶지만, 부모의 헛바람과 자기도취는 아이의 자존감을 속빈 강정처럼 만들 수 있다. 외부적, 순간적으로는 정상적으로 보이고, 내부적, 장기적으로는 비정상 궤도를 가고 있는 탈선한 우주선과 같아서 부모가 자신도 모르게 아이의 건강한 발달을 ‘착취’한다. 대개 공감력이 거의 없고 정서적인 삶이 얄팍하며, 거대한 환상 속에 살면서, 다른 사람의 찬사만 기다리고 있는 부모들인데, 이런 부모들은 아이들에게도 동일한 것을 요청한다. 키우는 자의 넘치는 자부심과 자아도취는 아이의 관계발달에 장애물이 되고, 심지어 아이의 나르시시즘의 재료가 되고 모델이 되기에, 아이는 부모를 만족시키기 위해 부모의 껍데기식 관계방식을 그대로 모방하게 하며 공갈빵 같은 자기의식에 빠지기 쉽다. 부모나 아이 모두 리더십이 있는 듯 보이지만 근거 없는 우월감을 갖고 성장하면서 분노, 우울, 열등감, 낮은 자존감은 이미 예약된 것과 다름없다.

부모 나르시시즘의 두 번째 특징은 ‘착각’이다.
부모들이 흔히 하는 두 가지 착각이 ‘지능 착각’과 ‘성품 착각’이다. 지능 착각은 ‘우리 애가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성품 착각은 ‘우리 애는 착한데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그렇다’이다. 먼저 기억하자. 머리가 좋은 아이들은 노력을 안 해도 중간은 한다. 아이는 부모의 착각을 충족시키기 위해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있는 ‘시늉’을 하기 쉬운데, 이 착한 아이들은 ‘효도’ 중이다. 친구를 사귀는 문제에 있어서도 비행행동에 주도와 동조가 그리 다르지는 않다. 요약하자면 부모의 소망과 사실 판단은 다를 수 있다.
사실 대단히 병리적인 부모가 얼마나 되겠는가? 모든 부모는 착각하고 살고 과장하며 즐거워한다. 착각은 부모가 아이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게 하는 매우 중요한 과정이고, 과장은 아이에 대한 사랑과 자신의 헌신에 대한 인정 욕구를 보여주는 것이리라. 다만 병리적 착각과 심각한 과장은 아이의 성장과 부모의 성장 모두를 왜곡시킬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 부모들은 어쩌란 말이냐!

최적의 나르시시즘
부모의 건강한 착각과 적당한 과장을 합쳐 ‘최적의 나르시시즘’이라고 불러보자. 아이에 대한 포기보다는 착각이 낫다. 그리고 아이를 과소평가하는 것보다 과대평가와 과장이 비교할 수 없이 더 낫다. 다만, 아이의 발달과정에서 유지되어야 할 신뢰감이 특권의식이 되지 않도록, 유아기 자율감이 착취적인 대인관계로 가지 않고, 리더십이 이기적인 배제능력이 되지 않고, 근면성이 자기 과장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조치가 필요할 것이다.

최적의 부모 나르시시즘을 위해 먼저 건강한 양육과 교육 정보를 얻기 위해 애쓰기를 바란다. 정보는 머리의 지평을 넓히고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의 기본 울타리를 제공한다.
둘째, 다양한 멤버로 구성된 지속적인 양육모임을 3개 이상 참여하라. 건강하고 다양한 부모집단은 정보를 나누는 공간일 뿐 아니라 양육의 주요 지침과 조언을 제공하며, 간접학습의 효과를 통해 행동과 사고의 2차 필터를 제공한다.
셋째, 부모의 자기분석을 시도해보라. 자기분석은 단순한 당면문제 해결을 넘어 생애진로와 방향을 탐색한다. 부모가 좋은 양육자가 되기 위해 자기분석을 받는 경우가 점차 많아지고 있는데, 자기분석을 시도하는 부모라면 자율과 통제 사이, 수용과 거부 사이의 적절한 조절과 조율을 보다 잘 해낼 수 있고, 부모의 자기 민감성과 아이에 대한 양육민감성 역시 높다.

부모기 동안 부모는 양육을 하며 아이가 ‘생존’을 넘어 ‘성장’을 지나 ‘성숙’에 이르도록 돕는다. 부모기는 자녀를 키우는 양육자로서의 자기정체 뿐 아니라, 부모의 자기 성장과 통찰을 발견하는 부모성장의 시기이기도 하다. 나르시시즘은 시야를 좁히고 결국 자기우물에 빠지게 하는 정서적 물귀신 같다. 그러나 최적의 나르시시즘은 물과 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 그리고 그 물에 비친 하늘과 물 속 물고기까지 보는 ‘견지’의 상태이자 과정을 보여주는 건강한 거리의 상징이다. 누구나 인생의 정글에서 길을 잃을 때가 있다. 부모 역시 양육의 자기 정글에서 길을 잃곤 한다. 그때마다 공부하고 관찰하고 분석해본다면 나와 아이는 인생미로에서 빠져나와 큰 시야를 갖게 할 ‘인생 지도’를 갖게 되는 셈이다. 이 봄날, 봄볕처럼 최적의 나르시시즘으로 아이를 잘 키워보자, 그리고 부모인 우리도 이 봄볕에 잘 성장해 보자. 그렇게 삶을 만끽하며 인생을 꽃대궐로 만들어보자. 그리고 미래를 향해 외쳐보자! 꽃대궐에 금쪽이가 피었습니다!

이호선
숭실사이버대 기독교상담복지학과장이자 한국노인상담센터장. 상담전문가이자 부모교육전문가로 활동 중이며 문화 칼럼니스트이다. <나이 들수록 머리가 좋아지는 법> <가족습관> 등을 썼으며 <이호선의 나이 들수록>을 글로 쓰고 영상으로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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