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거울아, 거울아 <플로렌스>

실화를 그린 영화
플로렌스 포스터 젠킨스(1868-1944)는 역사상 최악의 오페라 가수로 회자되는 인물입니다. 모차르트·베르디 오페라 아리아를 부르고, 카네기홀에서 독창회를 열기까지 했지만, 그녀는 누가 보아도 음치였습니다.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엄청난 조롱을 받았답니다. 영화 <플로렌스>는 그런 그녀의 일생 중, 말년을 그리고 있습니다.
부모로부터 어마어마한 유산을 상속받은 플로렌스는 뉴욕 사교계의 명사입니다. 지병 탓에 성격이 약간 예민하긴 하지만, 그녀는 관대하고 친절했지요. 당대 최고 지휘자 아르투르 토스카니니 등을 비롯해 여러 음악가를 지원하는 그녀의 음악에 대한 사랑과 열정은 실로 대단합니다. 하지만 어린아이같이 순진한 그녀 주변엔 그녀의 경제력에 기생하며 어떻게 해서든 한 푼이라도 더 뜯어내려는 속물들뿐입니다. 플로렌스의 심기를 관리하며 그녀의 일상을 세심하게 돌보는 매니저이자 (두 번째) 남편인 싱클레어 또한 그중 하나이지요. 그녀가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하니, 메트로폴리탄 부지휘자를 불러 성악 레슨을 시키고, 전속 피아니스트까지 붙여줍니다. 그러함에도 지독한 음치인 그녀의 음악 실력은 개선될 기미가 안 보여요. 싱클레어가 통제할 수 있는 지인들을 관객으로 모아 소규모로 콘서트를 열 때는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플로렌스의 음반이 라디오 방송을 타고, 이에 용기를 얻게 된 그녀가 뉴욕 카네기홀에서 콘서트를 열겠다고 하면서 이야긴 매우 복잡해집니다.

<벌거벗은 임금님>의 현실판 이야기
불편합니다. 상당히 불편해요. 영화를 보는 대다수의 관객이 웃음보다는 화끈거리는 민망함을 견뎌내야 합니다. 안데르센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의 현실판 이야기가 펼쳐진다고 보면 됩니다. 음치인 데다 음악적 감각 또한 엉망인 플로렌스가 노래를 부를 때, 싱클레어를 비롯해 성악 레슨 선생·반주자·청중 등 대부분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넘어가 줍니다. 심지어 극찬해대요. 그러곤 뒤에서 웃고, 또 피하지요. 하지만 그걸 모르는 플로렌스는 더욱 용기를 내, 더 큰 판을 벌리기 시작해요. 그럴수록 관객의 불안은 더 증폭됩니다.
플로렌스는 음악 안에서 지독한 나르시시즘을 드러내는 인물입니다. 그런 그녀의 자기애는 음악에 대한 성실함과 용기로 나타나요. 그녀는 과감하고 또 부지런합니다. 안타깝게도 실력이 없었지만 아니, 자기 자신의 실력을 몰랐던 겁니다. 그럼 그녀는 정말 눈치 없는 순진한 바보이자, 지독한 나르시시스트였던 것일까요?
그러나, 플로렌스 포스터 젠킨스의 과거를, 그리고 일생을 살펴보면 그녀를 그렇게 간단하게 매도할 수만은 없습니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플로렌스는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습니다. 아버지가 반대했지만 7살 경부터 음악에 푹 빠져 살다 10대 초반 백악관에 초대받아 러더포드 헤이즈 대통령 앞에서 연주했을 만큼 촉망받던 천재 피아니스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18살에 결혼하게 되는데, 어린 그녀가 선택한 남편 프랭크 손튼 젠킨스는 성적으로 방탕한 난봉꾼이었어요. 그때 남편으로부터 매독을 옮게 됩니다. 비록 20여 년간 서류상 부부로 지내긴 했지만, 그 사건 때문에 실제론 결혼 1년 만에 별거에 들어갑니다. 안타깝게도 플로렌스는 매독의 후유증 때문에 얻은 중추신경 장애와 특히 왼손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면서 피아노를 포기하게 되지요.
또 매독 치료를 위해 사용한 수은과 비소의 독성 탓에 플로렌스는 청력에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됩니다. 사실 그녀가 음치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기 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없었던 청력 상실과 중추신경 장애 때문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녀는 좌절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한 여성입니다. 영화에서 플로렌스를 잠깐 진단한 의사는 그녀 같은 몸 상태로 50세 넘은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80년 가까이 살면서 손가락이 안 되니 목소리로 음악에 도전하며, 음악을 무기로 죽음과 싸워온 전사(戰士)입니다.

플로렌스의 자기 실현적 나르시시즘
영화 속에선 콘서트에 대한 악평을 읽고 충격을 받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의 플로렌스는 그런 평가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더욱더 자신을 믿고, 꿋꿋하게 밀고 나아간 철인(鐵人)의 모습이었습니다. 힘들 것이라며 카네기홀 공연을 말리는 싱클레어에게 플로렌스는 영화 속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처칠 수상이 힘들다고 포기했으면, 히틀러가 버킹엄 궁전을 차지했을 것”이라고 말이죠. 그녀의 육체와 삶이 굴복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그녀는 그렇게 당당히 맞섭니다. 그녀는 유언처럼 이렇게 말해요.
“모두가 나더러 노래 못한다고 해도, 그 누구도 내가 노래를 안 했다고는 못할 겁니다.”

흔히 나르시시즘이 자기애성 성격장애로 나타나면, 주변을 억압하고, 타인의 꿈을 말살하게 됩니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나 때는 말이야” 등으로 시작되는 강력한 ‘휴브리스’(hubris: 오만한 태도)를 동반하며 세상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합니다. 하지만 플로렌스의 자기애는 결이 약간 다릅니다. 플로렌스의 자기 실현적 나르시시즘은 착취가 아니라 (비록 처음에는 조롱으로 드러나지만) 주변인들이 점차 힘을 얻게 되는 동력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녀 자신(自信)은 설사 웃음거리가 될지언정, 주변 사람들에게 오히려 힘과 희망이 되어줍니다. 그녀는 살기 위해서, 그리고 ‘이 세상에 더불어 존재’하기 위해서 자기를 믿은 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옳지 않으나, 그것이 만약 ‘탁월한 자기’를 추구하는 것이라면 옳다고 봤습니다.
결론적으로 플로렌스가 추구한 건 음악적 탁월함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영화 속 그녀는 탁월한 인간적 존엄, 그리고 탁월한 사회적 관계성을 보여줍니다. 타인을 짓밟기보다는 배려하려고 노력하고, 또 품으며 도와주려 해요. 그렇게, 그.녀.는. 했.습.니.다.

임택
단국대학교 초빙교수. 미국 오하이오대학교에서 영화이론을 수학하고, 대학에서 영화학과 미학을 강의하며, 철학과 인문학을 통해 영화를 독해하고, 시대와 소통하는 방법을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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