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보여주기'에 대해 : 잘 보이려는 노력이 어때서?

자기를 스스로 소개하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글과 사진, 동영상 등으로 알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나를 드러내야 알아주는 문화인 듯싶다. 거기에 외모와 스타일이 자신을 표현하는 매개체이고, 신체언어(body language)라며 겉모습을 가꾸는 일이 점점 중요하게 여겨진다. 그렇다면 자신을 잘 보여주려는 노력이 문제될 게 있나.

경쟁의 환경 속에서
여러모로 괜찮아 보이는 사람이 수상한 일을 해 매스컴에 오른 경우, 사람들은 자라온 배경이나 학력, 사는 형태를 보며 ‘보통 사람, 엘리트에 속하는데 왜 저런 일을 했을지 의문’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어떤 마음 상태가 그런 결과를 낳았는지, 그 내면을 살피는 일은 적절히 분석하지 못하고 지나간다. 그의 삶 속에서 겪은 내적인 갈등을 찬찬히 짚어볼 시간이나 여유가 없는 것이다.
삶이 왜 그토록 고단한지, 마음의 평안을 방해하는 요소는 무언지.
생각해보면 우리는 모두 나면서부터 경쟁 구도 속에서 산다. 형제자매 학교 친구, 회사 안팎 서열, 예술가의 등급, 동네 수준까지. 때로는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자신의 욕구 수준에 따라 내적인 갈등이 심각하게 존재한다.
융 심리학자 로버트 존슨은 우리에겐 외적인 삶과 내적인 삶이 있다고 말하며, 그 갭(gap)이 클수록 불안이 커 둘 사이의 균형이 역동적으로 유지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외적인 삶은 효율, 성과를 말하고 내적인 삶은 이상적인 관계, 고상한 자신감을 지칭한다.
각자 추구해가는 ‘더 나은 삶’은 우리를 계속 달리게 하지만 한편, 상대적이고 추상적인 목표 사이에서 ‘공허함’도 느끼게 하며 급한 대로 보이는 삶을 우선하게 한다. 우리 대부분이 그런 상태여서 서로 부추기기가 매우 쉽고 슬쩍 비쳐도 주변은 조급해지며 더 세게 나가게 된다. 여기에는 큰 것부터 사소한 것까지, 윤택한 이야기는 물론 (매우 사적인) 실패담이나 고생담까지 모두 동원시켜 보여주고 관심 끄는 데에 사용된다.
지나친 자기 보여주기
자신을 보여주는 삶이 지나치면 어떤 현상이 나타날까. 효율과 성과를 따라가는 외적인 삶을 살다 보면 연약한 사람을 향해 긍휼함보다 답답함을 가지며 무시하는 유형이 된다(권력형 콤플렉스). 그 반면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자기 자신을 남용하는 희생양 콤플렉스에 빠질 수도 있고, 어떤 일에 대한 보상을 많이 얻으려 하는 열등감 콤플렉스를 가질 수도 있다.
외적인 삶에 무게를 두면 ‘선한 일’조차 공적으로 하게 된다. 단테는 신곡에서 그런 사람을 ‘위선자’라 지칭하며, 사후에 겉은 금으로 입혔지만 속은 납으로 된 무거운 옷을 입고 영원히 행진하는 벌을 받는다고 했다.
일단 타인의 시선이 있으면 마음을 굴절시켜 표현하게 된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호손 효과’(Hawthorne Effect)로 지켜보는 사람의 유무에 따라 행동에 차이가 나타나는 현상이다. 즉 순수한 마음이 시선을 의식하면 쉽게 달라진다는 말이다. 이런 일화와도 통하는 면이 있다. 점수가 안 좋은 자신의 시험지를 감추었다가, 더 못한 점수를 받은 친구 앞에 슬쩍 보이게 되더라는 것처럼.

천재가 되어야만 했던 아이들의 드라마
심리학자 앨리스 밀러는 저서 <천재가 되어야만 했던 아이들의 드라마>에서 아이들은 고통스러운 감정을 감당할 수 없을 때 천재가 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천재는 엄마를 읽는 촉각이 일찍 발달해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일을 포기한 아이로, 적응할 수 있는 능력 덕에 고통의 기억을 마비시켜 살아남은 아이를 의미한다.
마음의 사랑과 관심이 가족관계의 중심이어야 할 가정에서 부모의 일, TV, 시험 점수 얘기가 주요 화제가 되면, 어린아이의 감정은 말라가며 자신이 나타나는 표면에 치중하게 된다. 그러면서 지나친 자제나 왜곡의 성향을 지니게 되기도 하고, 성과에 대한 압박으로 옳지 않은 방법까지 동원하게 될 수 있다.
부모 내면에 남아있는 이루지 못한 삶을 이루려는 아이, 부모가 이룬 것은 당연히 해야 하고 부모의 풀지 못한 문제까지 풀려는 것이 모든 아이가 잠재적으로 갖는 과제라니, 이 엄청난 과업 앞에 자녀들이 애쓰는 상태를 반드시 짚어봐야 할 일이다.

어떻게 풀어갈 수 있나
‘남들처럼’ 또는 ‘나만의~’라는 이상향을 꿈꾸지만 미흡한 상태를 지나게 되며 나타나는 감정은 불안과 두려움, 분노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그만 생각하자고 속의 감정을 접으면 당시 고통은 멈추나 안팎의 갭을 가진 현상은 심해지고 이어져간다. 겉이 부풀어 오르면 속에 비어있는 공간은 그만큼 넓어지는 것이고.
그러면 어떻게 필요 이상 겉을 부풀지 않게 할 수 있을까.
외부로 나타나는 모습을 마음의 부름에 따라 수정해가며 균형 잡힌 삶을 살아갈 방법으로, 로버트 존슨은 저서 <내 그림자에게 말 걸기>에서 몇 가지를 제안한다.

√ 내 인생에 붙일 제목이 무엇인가.
√ 놓친 기회는 언제였고 이유가 있었나.
√ 삶에 전환점은 무엇이었나.
√ 실패와 실망의 기억은 어떤 것인가.
√ 살아봤으면 하는 삶은 어떤 모습인가.


이런 주제를 천천히 하나씩 풀어나가면 내면에 남아있는 욕구를 보는 소중한 시간을 갖게 된다. 그러면서 낮추고 싶은 강박적 행동이나 분노, 교만과 자책, 고통과 무의미함에 변화도 가져올 수 있다.
“너희가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이 생각나는 부분이다. 이어 “네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면 깨끗해지리라.”(누가복음 11장 39절~41절) 답도 주신다.
경기 도중에 쓰러진 사람을 돕느라 뒤처지는 용기를 ‘온유’라 한다. 온유를 흔히 내성적인 성품이나 소심한 자세로 여기기 쉬운데, 온유는 자기를 ‘스스로 통제’해 경쟁에서 멈출 수 있는 능력으로, 이 시대에 배워야 할 덕목이다. 가볍게 자기를 드러내 남을 위축시키는 풍조 속에서 ‘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생각해본다.

전영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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