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숫자를 이해한다는 것

구한말 전래된 한국 개신교는 새로운 세상을 갈구하던 한국인들의 요청과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결합하여 유례 없이 빠른 성장을 거듭하여 왔다. 특히 일제강점기 혹한의 시대를 견디며, 해방 이후 닥친 분단과 6·25 전쟁으로 인해 삶의 터전이 뒤흔들렸던 사람들에게 위로와 소망이 되었다. 1970~80년대에는 급격한 경제성장과 더불어 교회는 매년 10% 이상의 양적 성장을 거듭하였고, 도시형 대형 교회들이 등장하였다.
이뿐 아니라 교회 안팎에 많은 기관들이 생기며 학교, 병원, 기업, 언론, 방송 등 사회 전반에 기독교인들이 자리하고 있다. 국회의원 중 기독교인 비율이 52%(개신교 38%, 가톨릭 24%)로 사회·정치·경제·문화·예술 모든 면에 있어서 그 영향력이 컸다.
교회의 이러한 성공적인 성장은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과 그 궤를 같이한다. 6·25전쟁 이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대한민국은 이른바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고, 우리 현대사를 읽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경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 사회는 더 이상 성장궤도에 있지 않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하여 둔화된 성장, 아니 감소세를 보이고 있어 그것을 되돌리려 하는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다.

교회 내부에서도 이러한 현상에 대해 자성의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다. 교회 성장학자 슈바르츠(Christian A. Schwarz)는 양적 성장이라는 교회성장론을 비판하며 교회의 내적, 신앙적 동력에 의해 ‘성숙’해 가는 것을 ‘성장’으로 설명한다. 이렇듯 새로운 패러다임의 성장이론의 등장은 개발 시기에 폭주했던 교회의 양적팽창에 대해 성찰하게 하며 ‘기독교적 가치’란 무엇인가를 묻게 한다.
‘가치’는 ‘수치’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수치에 매몰되면 오류에 빠지게 된다. 이 오류의 한 보기가 우리 민족이 경제적으로 ‘근대화’ 된 것이 일제 식민통치 시기의 덕이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일제강점기에 늘어난 도로, 철도, 전기시설, 교육시설, 의료시설, 농업생산량 등을 근거로 우리나라가 근대화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 읽기는 가치의 문제를 간과한다. 민족이 당했던 수치, 고난, 빼앗김, 관계의 깨어짐과 사회 붕괴 등과 같은 문제는 전혀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치로 역사보기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논의되었던 자본주의 연구에 ‘가치’의 잣대를 적용한다. 그의 저서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왜 개신교에서 자본주의가 잉태되었고, 확장되었는지에 대해 답한다. 경제적인 수치, 통계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가치의 영역’이 있었다는 것이다. 노동에 대한 개신교의 이해, 개신교인들의 윤리성 등 도식화 하거나 수치화 할 수 없는 정신이 자본주의를 발현시켰다고 본다.
그는 자본주의에서 ‘개신교 정신’이 상실되면 천민자본주의를 초래한다고 말한다. 천민자본주의는 결국 정경유착, 빈부격차, 도덕성의 타락을 가져온다.
오늘날 우리는 GDP(국내총생산)가 얼마냐, 우리 경제가 세계 몇 위냐, 연봉이 얼마냐, 집이 몇 평인가와 같은 경제주의에 함몰된 의식으로 ‘숫자’를 읽는다. 그리고 깨닫는다. 성공과 실패는 ‘수치’에 있지 않다고.

기독교 역사학자 박정신은 이러한 현실 속에서 ‘뜻’으로 역사 읽기를 제안한다. ‘수치’와 ‘경제논리’로 우리 역사를 온당하게 읽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무한경쟁과 이윤추구, 승자독식의 냉혹한 현실논리, 끝을 모르는 부에 대한 탐닉, 쾌락과 향락의 수단으로 전락한 노예노동. 이러한 것은 자본주의라고 할 수 없다.”
그의 주장은 교회에 그대로 대입해도 유효하다. 양적 성장을 위해 경쟁하고, 작고 가난한 교회 공동체가 주변부로 밀려나는 냉혹한 현실, 부의 복음을 전하는 동안 기독교가 본래 추구해야 할 ‘가치’를 잃어버리게 된 것은 아닌지. 우리가 진정 잊고 있는 ‘가치’는 무엇인지, 그 궁금증을 가지고 역사보기를 시도할 때다.

민대홍
본지 객원기자. 서로교회 담임목사로 파주 출판단지에서 문서 사역과 목회를 하고 있으며, 숭실대학교에서 ‘한국기독교 역사관’을 주제로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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