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숨, 살림, 삶

에덴동산 한복판에는 생명나무가 서있었다. 대지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마치 기도하듯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은 나무는 인간의 실존에 대한 상징처럼 여겨져 어느 문화권 속에서나 하늘과 땅을 매개하는 우주수(宇宙樹)로 대접을 받아왔다. 동산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나무 한 그루. 거센 바람이 몰아쳐도, 눈보라가 몰아쳐도 흔들릴지언정 뽑히지 않는 나무 한 그루가 우리 가슴에 심겨져 있다면 삶은 한결 든든해질 것이다.
남의 이목을 집중시키지는 못해도, 서러운 누군가의 비빌 언덕이 되어줄 수 있다면, 작고 여린 새들의 품이 되어줄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인도에 가면 반얀나무 숲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뿌리가 약한 반얀나무는 비바람을 견뎌내기 위해 제 가지에서 다시 땅으로 뿌리를 내리는 특이한 습성이 있는데, 땅에 닿은 뿌리는 기둥뿌리가 되어 나뭇가지를 받쳐준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한 그루 반얀나무는 숲 전체를 이루기도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숲이 더 푸르러지고, 그윽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가끔 산에 오르면 세찬 바람에 넘어진 나무를 본다. 가로로 누운 나무를 보는 것은 안쓰러운 일이다. 그간 견뎌온 세월의 무게가 얼마인데 저렇게 자기를 놓아버렸나 싶기 때문이다. 가로로 누워 뿌리를 드러낸 나무를 본다. 원뿌리는 보이지 않고, 곁뿌리만 무성한 경우가 많다. 물 한 방울을 찾기 위해 어두운 땅을 더듬어 내려가지 않아도 좋았기 때문일까? 때로는 좋은 환경이 복이 아닌 경우도 되나 보다.
더러는 흙이 파이고 깎여 뿌리가 밖으로 드러난 나무도 보인다. 그 뿌리가 곧 나무의 안간힘인 줄 알기에 가슴이 짠해진다. 어떤 이들은 그 뿌리를 짓밟고 무심히 지나간다. 그러나 그 뿌리에 흙 한 줌을 덮어주고 가는 이들도 있다.

영화감독인 타르코프스키는 <순교일기>라는 책에서 사막교부들이 전해주는 이야기 한 토막을 들려준다. 파반다 출신 파베라는 이름을 가진 수도사가 한번은 말라죽은 나무 한 그루를 가져다 산 위에 흙을 파고 심었다. 그리고는 요한 콜로그에게 이 앙상한 나무에 매일 한 동이씩 물을 주되 나무에 다시 열매가 맺힐 때까지 주라고 일렀다. 그러나 물가가 멀리 떨어져 있어 요한은 매일 아침 일찍 출발해야만 했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난 후 나무는 싹이 나기 시작했고,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파베는 열매를 따 교회 수도자들에게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서 이리들 와서 순명(順命)의 열매를 맛보도록 하시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쩌면 영악한 사람이 되기를 포기하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지금도 누군가 죽은 나무에 물을 주는 이들이 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생의 열매도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의 열매일 것이다.

겨울산에 가면
밑둥만 남은 채 눈을 맞는 나무들이 있다
쌓인 눈을 손으로 헤쳐내면
드러난 나이테가 나를 보고 있다
들여다볼수록
비범하게 생긴 넓은 이마와
도타운 귀, 그 위로 오르는 외길이 보인다
그새 쌓인 눈을 다시 쓸어내리면
거무스레 습기에 지친 손등이 있고
신열에 들뜬 입술 위로

물처럼 맑아진 눈물이 흐른다
잘릴 때 쏟은 톱밥가루는 지금도
마른 껍질 속에 흩어져
해산한 여인의 땀으로 맺혀 빛나고,
그 옆으로는 아직 나이테도 생기지 않은
꺾으면 문드러질 만큼 어린것들이
뿌리박힌 곳에서 자라고 있다
도끼로 찍히고
베이고 눈 속에 묻히더라도
고요히 남아서 기다리고 계신 어머니,
눈을 맞으며 산에 들면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바라보는
나이테가 있다.


나희덕 시인의 <겨울산에 가면>이다. 아무 말도 덧붙일 수가 없다. 그냥 이 시를 가슴에 담아두고 싶다. ‘도끼로 찍히고/베이고 눈 속에 묻히더라도/고요히 남아서 기다리고 계신 어머니’, 교회는 이런 교회여야 한다. 오래된 나무가 살기 위해서는 매년 여린 잎을 피워내야 한다. 죽은 나무에 물을 주는 이의 정성으로 생명과 평화의 잎을 피워낼 이들이 있어 행복하다.

김기석
청파교회 담임목사. 문학적 깊이와 삶의 열정을 겸비한 목회자이자 문학평론가이다. 그는 시, 문학, 동서고전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진지한 글쓰기와 빼어난 문장력으로 신앙의 새로운 층들을 열어 보여준다. 이 글은 <아슬아슬한 희망>에서 발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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