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새로움을 긷다, 읽기를 통해서

작가에서 독자로
예전에는 작가가 예술작품을 통해 ‘의미’(meaning)를 전달한다고 봤어요. 하지만 프랑스의 대표적인 구조주의 철학자이자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는 이런 전통적인 예술관 대신, 작가와 독자 사이의 새로운 관계가 정립된다고 말합니다. 작가가 예술작품 안에 의미를 담아 그걸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뭔가를 탐구하는 과정, 즉 ‘의미화’(signification) 과정을 보여준다는 거예요.
즉, 작가가 작품을 통해 어떤 의미를 생각하는 판을 깔아놓은 거고, 독자가 그 속으로 들어가 ‘나름의 의미’를 능동적으로 찾아가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따라서 작품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권력은 작가에서 독자로 이동하게 됩니다.

독자 모두가 평론가
이렇게 되면서 전문가로서의 평론가 입지도 자연스레 좁아졌어요. 평론가들이 작가의 특정한 생각을 진리인 양 찾아서 전달하고자 했던 시대는 끝났고, 독자 모두가 평론가가 되어 자신이 찾은 의미를 마음껏 전개하는 날이 열린 겁니다. 단 하나의 정답(正答)이 아닌, 여러 해답(解答)을 비교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시대인 거죠.
이제 책뿐 아니라 영화 또한 지적 유희 장소로서의 놀이터가 되었습니다. 감독이 일일이 떠먹여 주던 시대는 지나가 버렸어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만 보더라도, 관객이 누구냐에 따라 그 해석은 전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금수저와 흙수저의 생각이 같을 수 없고,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의 분석이 같을 수 없습니다. 봉준호 감독이 의도치 않은 걸 우린 찾아낼 수 있고, 그러면서 마치 작가인 양 의미를 추리해나가며 즐기게 됩니다.
과거엔 작가·감독과 독자·관객의 관계가 일방적으로 정보가 흐르는 신분적 위계질서 하에 있었지만 인터넷이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선 그 둘이 단지 기능적으로 구별될 뿐입니다. 각종 커뮤니티 사이트와 블로그, 그리고 SNS와 유튜브는 평범한 독자와 관객을 작가와 감독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제 수많은 대중이 뭔가를 만드는 시대가 되어버린 거예요.

생각하지 않는다면
인터넷은 정보 독점이라는 권력을 해체시키고, 공유의 시대로 전환시켜놨어요. 지상파 방송과 주류 언론의 힘은 빠지고, 유튜브와 SNS 등을 활용한 개인의 목소리는 갈수록 영향력이 증대되고 있습니다. 기존 언론인들이 더는 전문가 행세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오히려 네티즌한테 배우고, 사실 검증(fact check)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이제 네티즌이 쓰고, 전문가 집단이 읽고 답하는 시대가 된 겁니다.
이러다 보니 과거와는 비교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정보와 가짜뉴스가 범람합니다. 이런 시대에 과거와 같이 가만히 앉아 입 벌리고 떠 먹여주는 정보를 그냥 받아먹었다가는 돛대 잃은 배처럼 방황하다, 바보가 되거나, 자칫 괴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2차 대전 중 유대인 학살의 실무를 맡았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전범 재판 내내 자신은 그저 상급자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변론했습니다. 그 재판의 참관기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펴내면서,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악은 괴물처럼 별난 것이 아니라, 그저 ‘생각하지 않는 것’이 바로 악이라는 거죠. 인간이 생각하지 않는 기계가 되었을 때, 바로 악마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가짜 뉴스가 판을 치고, 시대에 뒤떨어진 엉터리 정보와 비전문적인 지식이 ‘지성’과 ‘변증’이라는 허울 좋은 가면으로 포장되어 돌아다닐 때, 더 더욱 면밀하게 그 시비(是非)와 진위(眞僞)를 가려야 합니다.
새로움을 긷기 위해서 문자든, 영상이든 ‘읽기’를 선택하려고 한다면 이제 나와 이웃, 그리고 이 시대에 대해 끊임없이 능동적으로 사유하길 바랍니다. 생각하는 나, 공부하는 우리, 철학하는 성도가 길러지는 것만이 우리 모두가 제대로 살길이라고 봅니다.

임택
단국대학교 초빙교수. 미국 오하이오대학교에서 영화이론을 수학하고, 대학에서 영화학과 미학을 강의하며, 철학과 인문학을 통해 영화를 독해하고, 시대와 소통하는 방법을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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