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새로움을 긷다, 읽기를 통해서

문학은 힘이 세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아포리아’()인데 그 의미는 ‘길이 없다’이다. 곧 ‘아포리아’는 눈앞에 처한 지독한 난관을 해결할 ‘길(방도)’을 찾지 못해 방황과 혼란을 겪는 불안한 상태를 말한다. 사실 작은 도시국가로 구성된 고대 그리스에게 있어 현안 앞에서 답을 찾지 못해 흔들리는 시민들의 동요는 곧 국가 전복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아포리아’는 지진이나 화산만큼 두려운 것이었다.

또한 둘째는 ‘아노모스()’인데 그것은 ‘법이 없다’는 뜻을 갖는다. 곧 인간의 심장 속에서 작동해야 ‘도덕과 양심’, 이 두 기능이 멈춘 무법상태를 가리키는 어휘이다.
현명했던 고대 그리스인들이 ‘아포리아’와 ‘아노모스’의 위협으로부터 자신들과 국가를 지키기 위해 선택한 묘수가 ‘문학(文學)의 장려’였다. 그들은 매년 희비극의 작품을 공모하였고 대상으로 뽑힌 작가에게는 왕이 직접 면류관을 하사했으며, 그 작품은 왕의 참관 아래 연극으로 상영되는 특권을 제공받았다. 이후 그 작품들은 치유가 필요한 환우들을 위한 ‘연극치료(Drama Therapy)’로도 활용되었다. 이 시대에도 불멸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소포클레스, 아이스킬로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들은 사실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되었던 것이다.
그랬다. ‘문학’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아포리아’와 ‘아노모스’로 자신들을 치유하기 위해 처방한 묘약이었다. 이렇듯 문학은 힘이 세다. 지금 이 시대도 그때 고대 그리스처럼 ‘아포리아’와 ‘아노모스’라는 두 개의 깊은 늪에 빠져 신음하고 있다. 그렇다면 ‘길 위를 걸으면서도 길을 잃고 사는 오늘의 세대’에게 고전을 애독(愛讀)하게 하고 이후 얻은 문학이 주는 힘을 ‘미궁에 들어간 테세우스를 탈출시켜준 아리아드네의 붉은 실’로 삼게 하면 어떨까?

고전(古典)이란?
영어문화권에서는 ‘고전’을 ‘클래식(Classic)’이라고 표기하는데 그 의미는 ‘일류가 되다, 규범이 되다’이다. 그런데 클래식은 라틴어 ‘클라시쿠스(Classicus)’가 그 어원이다. 고대 로마는 제국운영을 재원과 자원을 마련하기 위해 주변국가와 끊임없이 전쟁을 시도했다. 그런데 전쟁 때 필요한 것은 강력한 함대였다. 이런 이유로 로마를 사랑하는 귀족들은 사비를 들여 함대를 구매하거나 건조하여 로마 황제에게 바쳤다. 로마정부가 볼 때 함대를 바치는 사람은 일류 애국자였다. ‘함대’는 라틴어로 ‘클라시스Classis)’였다. 그래서 로마는 함대를 바친 충성스런 일류시민을 함대를 바친 사람이란 의미로 ’클라시쿠스(Classicus)’라 명명했고, 그 의미가 오늘날 고전을 의미하는 ‘클래식(Classic)’이 된 것이다. 따라서 고전은 단순히 오래된 책이 아니다. 고전은 ‘오랫동안 그 가치와 권위를 인정받은 책’이다. 이런 까닭에 고전은 과거가 들려주는 오늘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고전은 ‘생각의 게으름’을 살다가 자신도 모르게 이미 오래전 잃어버린 두 의문사, ‘왜(Why)’와 ‘어떻게’(How)를 다시 찾게 해주는 일류의 책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월든>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한 권의 책을 읽음으로서 자신의 삶에서 새 시대를 본 사람이 너무 많다”라고 격찬을 하였던 것이다.

고전 읽기, 그 눈부신 유익
1890년에 설립된 시카고 대학은 1929년까지는 주목을 받지 못하는 평범한 대학에 불과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대학은 1929년부터 2000년 사이에 노벨수상자 70여 명을 배출한 명문으로 존중받는다. 1929년 이후 이 대학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1930년 당시 서른 살이었던 로버트 허친스는 총장으로 부임하면서 ‘시카고 플랜’을 세우고 모든 재학생들이 졸업 전까지 ‘고전 100권 읽기’를 권장하였고, 이에 미달한 학생들의 졸업을 불허했다. 이후 시카고 대학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호메로스, 단테, 괴테의 글이 읽혀지기 시작했고 교정은 인문학적 소양이 증가함에 따라 건설적이며 치열한 토론문화가 정착되었다. 그리고 그 ‘문학적 힘’은 대학의 체질을 바꾸었고, 오늘날 세계의 주목하는 대학교육의 롤 모델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고전을 읽으면 세 가지의 유익이 있다.
그 첫째는 인류가 오래 동안 축적해온 지적, 문화적 유산을 받게 되는 유익이다.
기원전 8세기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읽으면 고대 그리스인들이 갖고 있었던 신(神)에 대한 태도, 인간의 행복에 대한 철학들을 알게 된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작품들을 읽으면 맥베스의 탐욕, 리어왕의 무지, 오셀로의 의심이 나타나는 장면에서 과거나 현재나 결코 변하지 않는 인간의 나약함을 확인하게 된다.

고전이 주는 둘째 유익은 자신이 갖고 있던 편견이 깨진다는 사실이다.
고전작가들은 자신이 살던 그 시대의 모순과 부조리를 온몸으로 부딪치며 아파하던 것들을 글로 담아냈던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의 글에는 시대를 조명하고 그 답을 제시한 예언적 성격이 있다.
1960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하퍼 리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는 시골 변호사의 핀치의 눈으로 본 ‘백인에 의한 흑인에 대한 이유 없는 차별과 폭력’을 실화로 묘사하여 당시 백인이 갖고 있던 근거 없는 우월감을 여지없이 깨뜨려버렸다. 이런 이유로 작가 프란츠 카프카는 “책은 우리 내면에 얼어 있는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렇다. 인간의 생각 속에 겨울 바다같이 얼어있는 편견과 무지를 깨뜨릴 도끼로서 고전문학만 한 것이 있을까?

세 번째 유익은 고전 속에는 인간의 삶에 대한 승리와 실패를 담아두었기에 독자로 하여금 삶의 시행착오를 줄여주는 신비를 제공해준다.
따라서 고전은 ‘태어나 처음 걷는 삶의 초행(初行)길을 친절하게 안내해줄 지도’와 같다. 작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나 <1984년>이 발표된 이후 학계에서 ‘지금 이 시대가 국가가 모든 것을 통제하는 전체주의(全體主義)로 가는 것은 아닌가?’라는 문제를 제기하게 된 것처럼 말이다. 이런 이유로 조지 브로드스키는 지금도 여전히 고전읽기를 거절하는 이 시대에 “책을 불태우는 것보다 더 나쁜 범죄가 있다 그중 하나는 책을 읽지 않는 것이다”라고 일갈했던 것이다.

읽어라, 그리고 생각하라
이 시대 자녀들은 부모를 닮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닮는다. 슬프게도 이 시대는 ‘욕망과 무례함의 시대’이다. 따라서 이 시대가 제공한 ‘욕망이라는 전차’에 탑승한 지금의 젊은이들은 균형과 조화로운 사고를 갖춘 ‘에토스(품성’)보다, 값싼 유희와 자극을 따라 닮아간다.
따라서 그 욕망이라는 전차를 멈추게 할 성능 좋은 제동장치가 필요하다. 고전은 ‘활자로 만든 제동장치’이다. 따라서 고전을 읽어야 한다. 고전을 읽으면 작가와 깊은 담소를 나누어야 한다. 그러면 자신도 모르든 사이 ‘생각이 큰 거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런 결심에 지금도 갈등하는 그대에게 오스티 펠프스의 이 말을 들려준다.

“그대여, 낡은 외투를 그냥 입고 새 책을 사라.”

김겸섭
성경해석 연구 공동체인 아나톨레와 문학읽기 모임인 레노바레를 만들어 ‘성서와 문학 읽기’ 사역을 하고 있으며, 현재 서울 방화동 한마음교회를 섬기고 있다. 저서로 <천사는 오후 3시에 커피를 마신다> <사랑이 위독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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