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우리 집 식탁은 어때요?

‘식탁’ 하면 떠오르는 소설 중 하나가 <고령화 가족>(문학동네, 2010)이다. 재담꾼인 천명관 작가가 저마다 실패한 사연을 지닌 한 가족의 이야기를 특유의 블랙 코미디 화법으로 써내려간 이 소설은 2013년에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 작품은 집을 떠났다 이십여 년 만에 다시 어머니 집에 모여 동거하게 된 삼남매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평균 연령 사십 칠세로 다시 모인 이 고령화 가족 이야기에는 어떤 밥상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고기를 굽고 함께 국을 떠먹는 밥상
먼저, 데뷔 영화가 흥행에 참패해 십 년 넘게 ‘충무로 한량’으로 지내던 둘째인 영화감독 오인모는 남은 것이라고는 낡고 초라해진 몸뚱이 밖에 없는 상태다. 절망 가운데 스스로 죽으려고 하는 찰나 엄마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망설이다 받은 휴대폰 너머에서 엄마는 모든 것에 허기진 그에게 거절할 수 없는 초대를 건넨다.
“닭죽 쑤어놨는데 먹으러 올래?”
오인모는 그렇게 닭죽을 매개로 구원의 손길을 내민 엄마의 집으로 들어간다. 집에는 120kg의 거구이자 백수인 형 오함마가 뒹굴 거리고 있다. 거기에 두 번째 남편에게서 이혼을 당하고 딸을 데리고 들어오는 동생 오미연까지 합세한다. 각자 실패한 사연을 가지고 중년의 나이에 집으로 돌아온 삼남매. 그런 삼남매에게 늙은 엄마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사람은 그저 잘 먹는 게 최고”라며 자식들에게 매일 고기반찬을 해서 밥상을 차려 준다.
소설보다 영화에서 이 엄마의 밥상은 더욱 선명한 이미지로 다가오는데, 영화는 끊임없이 먹는 장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모래알 같던 삼남매는 밥상 앞에서만큼은 엄청난 단결력을 가지고 참여한다. 저마다 삶에서 실패한 내용만 들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나이 먹은 자식들이라도, 엄마는 그저 자식들이 고기를 잘 먹는 모습이 흐뭇할 뿐이다. ‘식탁’하면 이 작품이 떠올랐던 이유는 바로 이 장면에 있다. 자식들에게 미안한 어떤 비밀스러운 사연을 지닌 엄마의 최선이 표현되고 전달되는 장소가 바로 식탁 앞이었고, ‘고기반찬’이라는 엄마의 최선은 자식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한편 자식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매개가 되고 있었으므로.
콩가루 같은 가족이지만 그들이 보잘 것 없으나마 가족으로서 하나 되고 공동체를 이루는 지점이 ‘함께 밥을 나눠먹는 순간’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음식을 나누며 유대감을 경험하는 이상향
여기에 더해 ‘밥상’ 혹은 ‘음식’의 정서를 품은 시를 고르라면 단연 백석을 꼽을 수 있겠다. 1930년대에 발표된 백석의 시들은 밥상 앞에 모인 전통적 대가족의 풍요로운 정서를 느끼게 해준다. 그중에서도 명절에 모여 음식을 나누고 놀이를 즐기는 대가족의 하루를 아이의 눈으로 그린 시 ‘여우난골족’은 백미다.
“명절날 나는 어머니 아버지 따라 우리 집 개는 나를 따라 …큰집으로 가면 …그득히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시는 안방에들 모이면 방안에서는 새 옷 내음새가 나고 인절미, 송구떡, 콩고물 찰떡 내음새도 나고 두부와 콩나물과 볶은 짠지와 고사리와 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흥성거리는 부엌에서 샛문 틈으로 장지문 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여우난골족’을 그림책으로 형상화한 <여우난골족>(창비, 2007)으로 시를 보고 읽으면 넓은 마당과 안방에서 어린아이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한 자리에서 풍성한 명절 음식을 나누는 장면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다. 이제는 애써서 노력해야 하는 공동체적 식탁이 자연스레 베풀어졌던 그때, 비록 먹을 것이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명절만큼은 풍성한 밥상을 나누며 진한 유대감을 나누는 장면에서 현대의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느낄 수도 있다.
<고령화 가족>처럼 다시 모여 화해의 공동체를 이루는 식탁이 절실한 시대에, 공동체적 식탁의 이상향을 백석의 ‘여우난골족’을 통해 그려볼 수 있다. 누군가를 일으켜 세우는 식탁을 꿈꾼다면 그 방식은 소설에서, 방향성은 시에서 얻어 자신만의 길을 찾아보면 어떨까.

박혜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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