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그래도, 이타주의

우리는 어떠한가
신문에 사흘 연속 특집으로 ‘로힝야 학살 보고서’가 온 쪽 가득히 실려 나왔다. 끔찍한 살해의 현장은 시간과 공간에 상관없이 세계 어디에서나 있었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미얀마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더더욱 읽어내기 힘들었다. 단아하고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군부 독재와 오랜 기간 싸워온 아웅산 수치의 모순된 모습을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노벨 평화상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의 앞뒤가 맞지 않는 행태를 소화해 내기 어렵다.
아웅산 수치만 그럴까? 그에게 실망한 우리는 어떤가? 종족이든, 혈연이든, 학연이든, 지연이든 이런 자기중심 생각의 틀로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럴 때마다 뼈아프게 참회한다. 하지만 돌아서면 또 다시 자기중심의 욕심을 품고 있음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이런 우리 자신을 보면서 ‘이타주의’를 말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심각하게 묻게 된다.
얼마 전 방영한 ‘SKY 캐슬’이라는 드라마가 왜 그렇게 문제작이 되었을까? 극중의 어른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만을 위해 살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친다. “너만 잘 해내면 된다. 그러면 네가 원하는 대학에 가게 된다.”
친구나 이웃에게는 마음도 쓰지 말고 눈길도 주지 말라고 한다. 이런 장면을 보고 시청자들은 자기만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면서 공감하고 안심했을지 모른다.
자기와 가족, 가까운 사람만을 위하는 것이 우리들의 본성이 아닌가 믿어버릴 정도이다. 학교 교장으로 은퇴하신 분이 평생 아이들을 교육하고 학부모를 대하면서 얻은 결론이 “사람의 본성이 이기적인 것 같다”고 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공동체 생활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자기중심의 ‘이기성’이 과연 우리의 본성일까? 서로 자기 이익만을 추구한다면, 싸우고 경쟁해야 하고, 이긴 사람이 힘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 하게 된다.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오른 소수에 속하려 애쓰고, 더 많은 사람들이 있는 아래에 있으려 하지 않고 그들을 무시한다. 꼭대기만으로는 피라미드가 성립되지 않는 것을 모르고 산다.

그래야 하는, 그럴 수 있는 이유
사실 우리는 힘을 가진 사람의 뜻을 따르고 순종하는 전체주의 사회를 원하지 않는다. 민주 사회에서 살기를 원해, 누구나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주인으로 살기를 바란다. 서로 다른 사람들과 각기 다른 채로 특징껏 살고, 서로 다른 사람과 협력하며 복되게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런 착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사람다운 본성을 갖추고 있는가 궁금해진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사람의 됨됨이를 우리는 성경에서 찾는데,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닮은 사람을 지으시고 “보시기에 아주 좋다(good)” 하셨다. 아버지를 버리고 떠난 자기중심의 ‘탕자’도 변함없는 사랑으로 기다리고 용납한 아버지처럼,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러니 하나님 닮은 우리의 속성은 서로 사랑하는 ‘착한’(good) 존재로 지음 받았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다르게 만드셨고, 각자를 위한 뜻이 있는데 우리가 자기마음대로(이기성으로) 자기와 다른 이웃을 연장 삼으면 안 된다. 이웃사랑을 가르치신 뜻은 자기와 다른 사람, 아무도 원수 삼지 말고 사랑하라고 하신 뜻이다. 이것이 바로 ‘이타주의’이다.
성경 말씀만이 아니라 뭇 생물과 사람을 관찰하고 연구하는 학문에서도 다행히 본성을 자기중심의 ‘이기성’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준다.
동물이나 사람의 사회본능은 동료들과 공감하고, 모여 있기를 좋아하며, 서로 친절하게 대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자기는 먹이를 받았는데 옆에 있는 동료에게 주어지지 않으면 동물들도 그 쪽을 걱정하고 신경 쓰는 표현을 한다. 그에게도 먹이가 주어진 다음에야 안심하고 자기 먹이를 즐기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자기를 보고 웃는 사람을 향해 웃는 어린 아기나 눈물 흘리는 어른을 보면서 같이 우는 아기를 보았을 것이다. 서로의 느낌을 공유할 수 있게 태어났다는 흔한 증거이다. 아주 어려서부터 우리는 서로 주고받는 배려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공존이 생존할 수 있게 해
그러기에 ‘이타성’이란 자기만 희생하고 손해 보면서 퍼주는 ‘자선’ 행위가 아니다. 고액기부자 클럽에 이름을 올리고 뽐내는 것과는 다르다. 생물의 오랜 삶의 과정을 관찰한 연구 결과를 보면, 자기 힘을 믿어 혼자 뽐내지 않고, 서로 기대어 같이 사는 친절한 생물들은 힘이 약해도 오래 살아남는다. 반면에 몸집도 크고, 힘이 세고, 공격성이 강한 생물종은 오히려 살아남지 못하고 지구상에서 사라진다. 작은 미생물과 개미 같은 곤충은 살아 있어도, 거대한 공룡은 지구에서 멸종되어, 과학박물관에 가야만 전시된 박제물로만 남아 있게 된다.
전쟁터에서 군인들의 행동을 연구한 사람의 한 이야기가 가슴 뭉클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군인들에게 사람을 겨냥해서 얼마나 총을 쏠 수 있었는가를 조사했다. 군인들 15%만이 사람을 향해서 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뒤로 무생물 과녁을 쏘는 훈련을 지속했고, 이 훈련을 강하게 받은 군인들이 월남전에서는 90% 사람을 겨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사격 훈련 외에 다른 배경 요인이 있었겠지만, 사람들의 작품인 사회 안에서 자라고, 사는 동안 길러진 요인들이 사람의 친절한 본성보다는 자기 생존을 위한 방향으로 치우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인간성을 잃게 하는 현대 문명을 경고하기 위해 쓴 소설 <멋진 신세계>의 저자 올더스 헉슬리 가문의 또 한 사람인 토마스 헉슬리가 한 말의 뜻을 마음에 새겨 본다. 다른 사람을 알아주고 아끼는 행동, 다른 사람들의 복지를 위한 이타성을 잃지 않게 적극으로 교육하고 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공공의 복지를 위해 모두가 각기 가진 특성을 살려 협력한다면, 모두가 그 혜택을 만끽하며 함께 삶을 감사하며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많이 가진 사람과 적게 가진 사람, 많이 배우고 적게 배운 사람, 힘이 강하고 약한 사람, 이런 차이가 사람들 사이의 삶의 간극을 엄청나게 벌어지게 만들고 있다. 그로인해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보살피는 경험에서 더욱 멀어지게 하는 여기, 오늘을 사는 우리가 가슴에 새겨야 할 말이다.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고, 보살피는 경험에서 멀어가기만 하는 세상의 방향을 틀어 본래의 형태로 되돌릴 수 있어야 하겠다.
예수님의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자기와 다른 사람을 알고 공감하고 사랑하는 행동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그런 자기도 다른 사람, 이웃의 이해를 받고, 공감을 받고, 사랑을 받는 이웃이 되는 것이다. 자기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 친척과 동창, 한민족 안에서만 사랑을 나누라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의 속 좁은 한계를 벗어나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고, 이것이 이타주의를 타일러주시는 말씀이다.

내가 몸담고 있는 모임에서 그렇게 사는 것이 “마음이 건강한 사람”의 자세라 격려하면서 꼼지락 거린지 벌써 서른 해가 넘는다. 상담소에 처음 찾아오는 이들은 자기 문제를 조금도 손해 보지 않고 풀고 싶어 한다. ‘같이 살기’는 생각도 못하고 오지랖 넒은 사람이나 하는 것이라며 자신과는 상관없는 영역이라고 여긴다. 절대로 손해 볼 수 없다는 단단히 굳은 마음을 가진 어머니 품에서 자랐고, 자기도 그것만이 살길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마음을 같이하여 살면서’, 같이 아이들을 기르면서, 엄마들과 아이들이 같이 천천히 바뀌어 간다. 돌쟁이 아들을 안고 왔는데 이제 그 아이가 대학에 들어가게 된 여성이 있다. 한 푼도 손해 보면 안 된다던 외할머니가 착하게 자라는 손자를 보면서 “착한 것이 정말 좋구나!” 알아 볼 수 있게 되었다.
멀리 미얀마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세계 어디서나 다른 사람들과 같이 따스하게 살면서 풀어가야 하는 문제는 날로 많아진다. 혼자 똑똑하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돈만 있으면 된다던 사람들도 두 손을 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슬프게도 우리 사회문화에서 서로를 향한 마음을 알아주는 영역을 잃어가고 있다. 이제 ‘서로를 향한 마음 알아주기가 공생의 뿌리가 된다’는 가치관을 살려야 한다.
갓난아이 때부터 어른들과 서로 눈을 맞추고 마음 읽기를 열심히 하며, 마음을 표현할 때 들어주고, 또 알아들었다는 표현을 하여, 서로 각기 혼자만의 세계로 후퇴하지 않게 해야 한다. 어른들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일방의 관계에 익숙하도록 자란 우리네 아이들은 자기 마음이 어떤지도 모르고 남 따라 살기만 배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각 아이에게 주신 특징을 잃어버린다. 하나님의 계획을 사람들이 망쳐서는 안 될 일이다.

문은희
(사)한국 알트루사 여성상담소 소장이며, 계간지 ‘책으로 만나는 심리상담지’ <니>의 편집인이다. 애타주의(愛他主義, altruism) 정신으로 여성들이 자신의 삶을 건강하게 바꾸고, 나아가 이웃과 더불어 착한 사회를 만들도록 ‘정신건강 사회운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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