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그래도, 이타주의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는가?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되어 자존감 높은 모습으로 살아도 인간에게는 ‘실존적 공허’의 자리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삶에 ‘의미’를 갖고자 하는 높은 단계로의 끌림 때문인데, 이에 대해 현대 경험주의는 “타인을 위한 행복에 관심을 가지며, 도움을 주는 자세로 살 때 사람들은 자신을 ‘쓸모 있게’ 느끼게 된다”고 답한다. 인간의 자기중심성과 이타성은 기묘하지만 동거하며 상호 보완한다는 것을 연구 결과들이 뒷받침하고 있다. 한 예로, 우울한 기분을 넘어서는 데는 남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이 효과가 있고, 병적인 슬픔을 예방하는 데에도 봉사가 특효약이 된다고 한다.

대표적인 심리학자 애덤 그랜트는 그의 저서 <기브 앤 테이크>를 통해 타인을 위해 베풀고 헌신하는 행위가 삶에서 어떻게 성공으로 이어지는지를 객관적으로 증명한다. 곧 효과적으로 자기 이익을 추구하려면 자신에게만 집중하기보다 타인을 위한 자리도 확보해두라는 것이다. 여기서 실제 ‘기브 앤 테이크’ 공간을 하나 소개하려 한다.
보스턴에 있는 신학교 기숙사에 들어가서다. 낯선 곳에 자리 잡아 살려니 필요한 물품들이 자꾸 드러났다. 얼마나 머물게 될지도 몰라 우왕좌왕하는데 학교 건물 모퉁이에 물건을 공유하는 공간이 있음을 알게 됐다. 마을 사람들이 가져다 놓는 옷, 신발부터 커튼, 장식품, 아이들 도서와 부엌 용품을 위해 학교에서는 큰 홀을 내어 주었고, 자원봉사자들이 말끔히 진열해놓고 있었다.
그 시절 내놓을 것은 없이 필요한 것만 가지러 거의 매일 드나들며 깊은 고마움을 가졌던 기억이 생생하다. 대부분 깔끔하게 만져진 물건들, 작은 부품들까지 챙긴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나중에 꼭 이런 공간을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게 했던 경험이다.

어떻게 이타주의 자세를 펼칠 것인가
남을 돕는 것은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아주는 것으로 그가 필요로 하는 것에 협력하는 마음과 돕고 싶은 애정을 더하는 것이라고 슈테판 클라인은 저서 <이타주의자가 지배한다>를 통해 강조한다. 돕는 일은 내 마음대로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먼저 읽어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을 간과하고 내 방식대로 남을 돕다가 몸과 마음을 다치고 관계가 깨어지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다. 돕고 싶은 열정으로 다가갔다가 에너지가 바닥나는 일, 마음을 몰라준다며 물러서는 일이 생기면 이타주의의 마음은 소진될 수 있으므로, 늘 자신을 돌아보고 보호해야 하는 점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선을 행하다 낙심하지 않으려면 자신의 삶에 우선순위를 세우고 효율성을 추구하는 것이 지혜로운 방법으로 제기된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보살필 줄도 알아야 하며 자신에게 어떠한 방식으로든 보상을 해나가는 가운데 일을 지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보상은 스스로 격려하는 표현을 하는 것으로 지나치게 다른 사람의 칭찬을 기대하지 않게 하는 기본적 힘이 되기도 한다.

균형 잡힌 봉사
살아가며 깨닫는 것들을 저장하고 기억했다가 필요할 때 발휘하는 일은 직관처럼 매우 중요하게 쓰인다. 자신의 선한 동기를 감지하고 인정하는 가운데 스쳐 지나치지 않도록 스스로 격려하는 것이 중요함은, 이타주의의 기질 역시 갈고 닦을수록 성장하고 지속적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없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또 한 가지는 자신의 인정 욕구를 바라보며 적정 수준을 지켜 가려면 주변의 평판도 듣고 참고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균형 잡힌 봉사는 앞서 말한 자신에게도 유익한 이타주의 행위가 되어 스트레스를 감소시키고 사랑의 호르몬이라 불리는 옥시토신, 바소프레신을 내어 주변을 행복하게 하며 상대방의 행복에 쓰임 받음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 호르몬을 신비의 액체라고 비싼 가격에 판매도 하고 있다고 한다).

남을 편안하게 해주려는 자세…‘우아함’
손님이 몰리는 시간, 레스토랑 주방에서 조화롭게 움직이는 요리사들의 모습을 ‘우아함’이라고 집어낸 <우아함의 기술> 저자 사라 카우프먼은 “그들은 각자 자신이 맡은 일을 해낼 뿐 아니라 옆 사람이 맞춰 일하도록 보조를 맞춘다”고 했다. 질서 있게 조화를 이룬 가운데 관심과 연민의 마음이 함께 할 때, 분주함은 건조한 일터가 아닌 ‘우아한 모습’을 연출해내는 것이다. 또 다른 우아함으로 균형 잡힌 몸을 느긋하게 움직여 옆 사람을 편안하게 도와주는 모습을 말하는데, 문득 필요한 점을 찾아 말을 건네거나 함께 뛰어주는 마라토너의 응원단이 떠오른다. 소란스럽지 않고 자족적인 침묵 가운데 상대가 필요로 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모습은 평범한 사람의 손길로 특별한 기쁨을 만드는 것이라고.

<인생 후르츠>라는 영화에서는 “인생의 후반에 좋은 일을 만나게 되었다”며 노 건축가가 설계비를 거절한 채 맡겨준 일에 고마워하며 몰두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평생을 자연과 공생하는 건축으로 살아온 사람이 마지막 프로젝트가 될지 모를 정신병원을 자연 속에 짓는 일에 헌신하는 것을 보며 이야말로 우아하고 합리적인 이타주의의 모델이라 여겨졌다.
그의 계획안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할 수 있는 것부터 조금씩, 꾸준히, 시간을 모아서 천천히.’

전영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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