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철 기자의 일본 현장리포트

* 윤동주 : 1917년 12월 30일생,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1945년 2월 16일, 원인 불명의 사인으로 사망. 향년 2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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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릿쿄 대학에서 연세대 극예술연구회 선후배들이 윤동주의 시로써 극을 만들어 공연했다. 콘서트홀에서는 서울예술단의 창작 뮤지컬 “윤동주, 달을 쏘다” 공연이 이어졌다. 11월 23일 하루 동안 릿쿄 대학은 온통 윤동주의 날이었다. 올 겨울 들어 서울의 날씨가 가장 추웠고 눈까지 내린 그날, 도쿄에서는 늦가을의 정취가 무르익는 가운데 동주의 시화전과, 강연회, 좌담회, 영화 상영 등이 이어졌다.
무엇보다 일본 전국에서 모여든 윤동주의 애인들이 있어 더욱 따뜻했다.
“윤동주로부터 평화의 메시지를 배워서 우리 각자가 시대의 가치관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의 양심에 따라 생각하고 보편적인 가치를 찾아내어, 용기를 갖고 행동하는 것을 소중히 하고 싶습니다.”
윤동주의 고향 방문 모임을 만든 수필가 야나기하라 야스코 씨의 한 마디 한 마디는 가슴에 나이테처럼 남는 느낌이었다.
뮤지컬 공연 도중에는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고, 공연을 마쳤을 땐 기립하여 박수를 보냈다. 릿쿄 대학의 전 총장이던 오오하시 히데이츠 씨가 “과거의 역사를 돌이켜보는 거울로서, 오늘의 역사를 생각하는 잣대로서, 시인의 문학과 고결한 정신을 기념하는 이 모임이 계속해 나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다는데, 어쩌면 일본인의 양심은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게 아닐까. 겉으로 드러나는 거대한 일본의 비웃음과 어리석음은 꾸짖고 물리쳐야 할 현상일 뿐이었다. 가치로 보면 결코 한 줌의 무게도 되지 않을 먼지 같은 소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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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와 우리가 무슨 관계가 있는데?”
시간과 돈을 써가면서 윤동주의 탄생 100돌을 나름으로 그려보고자 할 때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윤동주와 우리를 이어보려던 나는, 잠시 주춤했다. 대체 그와 나를 잇는 끈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단순히 동포이고, 그리스도인이고, 시를 썼고, 또 무슨 학교를 나오고, 그런 끈들로써 윤동주와 우리를 이어보려는 사람들을 향해 윤동주와의 관계를 캐묻는 그의 차갑고 매서운 한 마디는 차라리 ‘난 관심 없어’ 하는 말처럼 들렸다.
그래, 그런 게 아닐 게다. 윤동주를 연구하고 그것으로 논문을 쓰고 전문가의 명함을 가졌더라도 그 관심의 내용에 따라서는 단지 그들만의 축제에 머물고 말 것이다. 그 또한 먼지 같은 목소리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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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김우중 선생은 윤동주의 삶과 시로써 윤동주를 바로보고자 했다.
선생은 결국, 식민지의 슬픈 백성들은 물론이고 스스로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조차 모른 채 미치광이처럼 수 없는 목숨을 죽음으로 내몬 가해국의 백성들까지, 그는 어쩌면 ‘모든 죽어가는 것들’로 가엾게 바라보며 그들을 사랑하고자 한, 그렇게 십자가를 지고자 한, 슬픈 청년 윤동주를 읽어냈다.
“서정시의 매력은 철학적 주제 같은 지적 가치가 아니라 가슴을 울리고 적시는 아름다움이고 그것이 서정시의 본질이다. 이런 아름다움의 가치는 가슴속의 울림의 크기와 지속성과 순수성이 결정하는데 이런 의미에서 ‘별 헤는 밤’은 아름다운 서정시의 명작이다.”
윤동주의 가슴이 지니고 있던 그 아름다움의 정체를 묻고 또 물으며 찾아 나선 끝에 도달한 결론이었다.
김 선생의 결론은 아마도, 윤동주의 시가 지닌 뿌리는 민족보다 더 깊고, 독립보다 더 간절하며, 내 나라의 말보다 더욱 본질적인 어떤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끝내 남는 것, 끝내 사라지지 않는 것, 우리의 자유로운 영혼이 가져다줄 그 어떤 것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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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1995년 교토 도시샤(同志社) 대학에 세워진 그의 시비에는 여전히 하늘과 바람과 별을 노래하던 식민지의 젊은 청년이 맑고 빛나는 얼굴로 세상의 모든 젊은이들과 마주보며 서있다.
바로 어제 밤 뮤지컬로 살아 온 동주의 삶을 바라보며 눈물 흘리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당신의 꿈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하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렇게도 억울하게 떠나야만 했던 한 젊은이를 통해 그들은 어쩌면 세상의 모든 상처와 눈물 앞에서 회개하는 듯 보였다.
릿쿄 대학에서 윤동주의 꿈을 다시 지펴 온 유시경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우리가 윤동주를 기념하는 것은, 젊은 나이에 죽은 한 사람의 시인만이 아니라, 그와 마찬가지로 왜곡된 시대 속에서 인생과 생명을 빼앗긴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이고, 또 다른 윤동주를 낳지 않기 위함이기도 하다.”
동주의 마지막 시간이 긴박하게 흘러가던 도쿄와 쿄토와 후쿠오카를 지나오는 동안, 내 눈앞에는 십자가와 흰 옷과 노란 리본 같은 눈에 익은 많은 상징들이 나부끼는 듯했다.
우리는 누군가를 지켜주지 못한 사실을 깨닫고서야 비로소 우리의 구원에 이르는가, 싶었다. 동주 앞에서 더욱 슬픈 나를 본 셈이었다.

일본=박명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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