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기억한다는 것

망각은 축복이라는 말이 있다. 사는 동안 겪는 그 모든 일들을 생생하게 기억한다면 삶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란다. 하긴 산 사람은 살아야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기억, 끔찍한 일을 겪은 기억, 누군가에 의해 해를 당한 기억, 이런 것들을 어제 일처럼 기억하면서 산다면 하루 하루가 ‘지옥’일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어떤 과거는 기록하고 새기고, 때론 의례를 만들어서라도 기억해야 한다. ‘산 사람이 살 수 있도록’ 기억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어찌하면 살리며 살 수 있는지, 어찌하면 죽이지 않으며 살 수 있는지. 이 절박한 삶의 숙제를 실천하려면 우리는 과거에 살고 살렸던 기억, 죽고 죽였던 기억을 현재로 자꾸 불러와야 한다.

기억하고 선택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오늘 기억하라! 그리고 삶의 선택을 하라.”
여호수아는 공동체를 이끌던 삶을 마치고 노년에 마지막 고별설교를 하며 이렇게 말했다(여호수아 24장 참조). 몇몇 지도자들을 불러 통치의 노하우를 전수하는 대신, 전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 ‘해방과 자유를 주신 하나님의 역사’를 회고했다. 너희들이 꼭 기억해야 할 과거라고. 죽이는 일에 몰두했던 애굽 사람들이 어찌 되었으며, 살려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삶의 방식이 어떤 것인지를 마음에 새기라고. 그래야 살면서 내 위치가 바뀌어 행여 이웃을 착취하고 죽일 수도 있는 권력을 갖게 되어도 과거의 일들을 기억하며 살리는 선택을 할 수 있는 거라고.

사실 어려운 선택이었을 거다. 왕도 없고 군대도 없이 오직 여호와만을 왕으로 섬기고 여호와를 성벽이요 산성으로 고백하고 사는 신앙의 삶! 하지만 억압받고 죽임 당했던 애굽에서의 생생한 기억은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이 삶을 합의하게 했다. 공동체의 기억은 이렇게나 힘이 있다.
2014년 영화 <국제시장>이 흥행했던 것은 6·25 한국전쟁을 경험한 공동의 기억 때문이다. 2016년 5월 강남역 살인사건에 젊은 여성들이 공동의 추모와 더불어 더 이상 이런 일이 없도록 저항의 연대를 한 것도, 또래 여성들의 일상의 경험(추근댐, 희롱, 비하, 혐오)이 결집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나 ‘공동의 기억’은 큰 힘을 갖는다. 다시는 이런 비극과 슬픔이 우리 안에서 반복되지 않도록 다짐하고 실천하게 하는.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네.” 대답도 열심히 했던 이스라엘은, 그러나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서 군주제에 합의했고 남유다도 북이스라엘도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왕들’에 의해 수많은 착취와 죽음이 있었다. 인간-왕을 요구한 사람들은 애굽에서의 일도, 거기서 구해내신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도 다 잊은 후손들이었다. 200년쯤 지난 뒤의 이스라엘은 수직적인 왕 시스템과 군대가 있는 삶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잊고’ 있었다. 직접 겪은 일이 아니니까. 전해주고 전해주던 조상들도 이제는 사라졌으니까. 하여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주변 나라들의 모습처럼 그렇게 위계를 세우고 그 밑에 스스로 꿇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말았다.

실은, 그럴 수밖에 없다. 개인도 공동체도 과거를 오늘처럼 생생히 기억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니까. 그래서 ‘의례’ 즉 의미를 가지고 함께 반복하는 일종의 의식이 필요하지 싶다. 성경에도 ‘기억’의 의미를 담아 반복된 의례들이 전해진다. 그중 하나가 ‘입다의 딸’을 기억하며 애곡하는 이스라엘 여인들의 의례다. 아버지의 어리석음과 불신앙, 아니 필시 ‘기생의 아들’로 살며 받았던 멸시를 설복하고자 ‘여호와 전쟁’에서 여호와를 의지하는 대신 일종의 ‘딜’을 했던 입다의 욕망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매년 이스라엘의 딸들이 입다의 딸을 위해 나흘씩 애곡하는 것을 보며 그 공동체는 기억했을 거다(사사기 11장 참조). 아, 사적인 욕망을 위하여 하나님께 섣부른 서원을 하는 것이 저렇게나 위험하구나. 이걸 잊으면 자기 권력을 위해 자녀들을 힌놈 골짜기에서 불사른 남유다의 왕 아하스나 므낫세 같은 ‘삶의 선택’이 발생할 수도 있는 일이다.

살리는 선택을 잊고 사는 어른들에게
그런 의미에서 ‘기억하기 고통스럽고 슬프지만’ 오늘날 교회가 의례를 통해서라도 꼭 지켜야 할, 그래야 다시는 반복되지 않은 아픈 과거가 ‘세월호 참사’라고 생각한다. “됐다. 그동안 너무 길었다. 지겹다. 이제는 그만 해라. 충분하지 않나.” 하지만, 세월호 참사는 여러 가지 면에서 어른들이 제대로 기억하고 정신 차리고 살리는 선택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요 하나님의 기쁨인 ‘아이들’을 그렇게 어이없게 잃을 수도 있음을 경고한다. 살리는 선택을 삶 가운데서 잊고 산 어른들이 벌인 일이다. 그걸 잊고서야 어찌 미래가 생명 가득하겠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의 살리는 선택이 훗날 아름답게 기억되기를 소망한다. 그렇게 기억될 ‘현재의 살리는 사건’들이 교회에서, 지역에서 만들어지기를 기도한다.

백소영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외래교수. 다양한 문화현상들을 그녀만의 따듯한 시각으로 분석한 강의와 글쓰기로 기독교세계관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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