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짐을 준비하는 몇 가지 마음-들어드리기

헤어짐을 준비하는 세 번째 마음은 ‘들어드리기’이다. 살아온 부모의 인생을 논쟁 없이 가만히 들어드릴 때, 부모님에게는 치유가 일어나며 우리에게는 이해가 일어날 것이다. <편집자 주>

지난 몇 년 동안 어르신들의 회고록 또는 자서전 집필을 돕는 일을 해오고 있다. 어르신들은 대부분 일흔이 넘은 분들로, 해방 전후에 태어나 전쟁을 겪고 산업화 또는 민주화의 주인공으로 일하시다가 이제 은퇴 후의 시간을 보내는 분들이다. 모두들 당신들이 살아온 세월 속에서 아픔과 기쁨, 가난과 풍요, 성취와 실패, 배신과 화해의 시간들을 추억하며 비로소 삶이 가져다주는 감사와 보람을 발견하는 모습을 보며 눈시울을 적신다.

전쟁의 시간에 대한 기억
세월은 망각(忘却)의 아픔 또는 고마움을 동시에 지니고 흘러간다. 가물가물하여 기억할 수 없는 시간들을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러서 오히려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짠해진다. 기록이라도 해두었더라면, 하고 후회하지만 이미 사라져버린 시간들이다. 나는 이런저런 방법들을 동원하여 어르신들이 망각해버린 시간을 복구해보고자 노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분들에게는 결코 망각할 수 없는, 아니 망각되지 않는 세월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는 발견했다. 그것은 ‘전쟁 같은’ 시간이 아닌, ‘전쟁의’ 시간이었다.
적어도 내가 자서전 집필을 도운 어르신들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전쟁의 경험을 회고하는 순간 어느 때보다 초롱초롱한 기억으로 그 시간을 이야기했다. 마치 어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듯 시간대별로 촘촘하고 또렷하게 이야기해주었다. 그리고 예외 없이 그 시간 속에서는 사랑하는 누군가의 죽음이 도사리고 있었다. 피난길에서 포탄을 맞아 아버지가 사라지는 모습을 본 나의 아버지처럼, 어르신들은 내게 아픔과 고통과 분노와 두려움으로 그 시간을 이야기해주었다.

다시 들어드려야 한다
그렇게 많은 어르신들이 경험한 전쟁 공간의 기억을 듣고 또 공감하면서, 나는 지금까지 책이나 영화로 접하여 알고 이해해 온 6·25한국전쟁의 모든 정보들을 재정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폐기하거나 수정되어야 했다. 그분들의 기억체계 속에서 1950년이란 시간은 작년 곧 2016년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그때까지 풀리지 않던 문제 하나가 해결되는 느낌이었다.
그 풀리지 않던 문제란, 나의 어머니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어르신들이 유난히도 북한에 대해, 좌익이나 사회주의, 또는 진보 등의 단어에 대해 합리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은 이해를 하신다는 점이었다. 그때마다 대화로 설득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져버렸다.
언젠가 은퇴를 앞둔 목사님이 설교시간에 그런 당신의 생각과 마음을 너무 당연한 듯 말씀하시는 바람에 청년들 여러 명이 함께 교회를 나가버리는 일까지 생겼다. 그때 나는 청년들의 마음을 두둔했고, 무리하게 그리고 논리적이지도 않은 이념의 편향성을 보이신 목사님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 나는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온전히 공감할 수 있게 됐다. 바로 어제 일어난 전쟁, 거기서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 누이와 동생이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껏 울지도 못한 채 피난길을 서둘러 떠나야 했던 그들의 어린 시간들, 그 시간들을 살아온, 아니 살고 있는 분들이 내 앞에서 ‘노인’이라는 모습으로 살아계신다는 걸 알게 되었으므로.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어르신들은 당신들의 간절하고도 고단했던 시간들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나 같은 사람에게 비로소 마음을 열어주었다. 내가 가진 사상이나 편향에 상관없이 함께 마주앉아 공감대를 열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깨달았다. 들어주어야, 아니 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듣고, 그리하여 함께 망각해선 안 될 시간을 기억으로 남기고 그 토대에서 비로소 내일을 열어갈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래서이다. 유난히 노인세대가 많이 모이는 교회에서라도 어르신들이 살아온 시간들을 자녀의 세대들이 진지하게 듣는 노력을 하면 좋겠다. 세대갈등을 말하고 진보와 보수의 갈등을 이야기하지만 이런 갈등을 녹여가기 위한 노력은 어디에서도 잘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 첫걸음이 ‘들음’이라고 믿는다. 어르신들의 특별한 경험이 만들어낸 소통의 한계들을 이제 들음으로써 극복해 나가자.
“들어라 이스라엘아” 하고 강조한 성경의 가르침처럼 “들어라 젊은 세대여”라고 호소한다. 이렇게 될 때 교회가 세대갈등이라는, 아니 이념갈등이라는 우리 사회의 아픔을 녹여내는 화해의 마당이 될 수 있으리라고 희망한다.

박명철 기자
저작권자 © 아름다운동행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