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공들이다

비 개인 오후, 서점에 들려 가벼운 손길로 새 책을 고르는 일은 언제나 황홀하다. 특히 오랫동안 기다리던 작가의 신간을 만나 그것을 꺼내들 때의 기쁨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새 책을 구매할 때마다 ‘세 가지 감사’를 하게 되었다.

첫째는, 이 책을 집필하신 저자, 곧 작가에 대한 감사이다.
사실 책이란 그 저자가 일생동안 탐구하고 침잠(沈潛)해온 분야를 활자에 담은 기록이다. 그런데 독자는 그 저자가 탐구한 그 분야에 대해 전혀 모르지만, 약간의 비용을 지불한 후 그 저자의 ‘전부’를 ‘내 것’으로 소유하는 특혜를 받으니 말이다.

둘째는, 그 책을 발행한 출판사의 편집인들에 대한 감사이다.
사실 그 저자의 모든 것을 얻으려면 그 저자를 직접 만나서 육성(肉聲)을 들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특히 저자가 세상을 떠난 후라면 그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그런데 출판사가 작가의 ‘모든 것’이 담긴 보고(寶庫)를 책으로 발간해주니 독자로서는 여간 고맙지 않다.

셋째는, 그 책을 번역해준 역자(譯者)에 대한 감사이다.
그렇다. 책의 그 저자가 외국인일 경우 부득이 ‘번역’이라는 과정이 따른다. 그런데 사실 번역이라는 작업은 극히 정밀하고 섬세한 수고를 요한다. 자칫 번역이 잘못되면 본래 글의 향기와 의미가 퇴색되는 참사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얼마 전, 어떤 계기로 인해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대한 강의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래서 서점에 들러 동일한 책 네 권을 사서 한 문장마다 비교해가며 다시 탐독을 해봤다. 그런데 각 책의 번역자가 보여준 번역역량의 차이는 너무도 컸다. 어떤 역자의 번역은 그 내용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지독한 난역(難譯)이었다. 그러나 한 역자(譯者)의 번역은 너무 수려하고 아름다워 읽는 내내 연신 감탄했다. 그 번역본을 다 읽고 덮으면서 스스로에게 한 말은 “이 분은 번역에 참 섬세한 공(功)을 쏟았구나”였다. 이후 외서(外書)는 그분의 번역본만을 찾게 되는 새로운 습관도 생겼다.

어떤 일에 ‘최선’과 ‘정성’을 담는 행위를 ‘공(功)을 들인다’라고 한다. 사실 ‘공(功)’이라는 한자(漢字)는 ‘집을 지을 때[工], 마지막까지 힘[力]을 다한다’라는 의미이다. 그렇다. 동굴에서 맹수와 폭우로부터 은신하며 살던 고대사회 사람들에게 있어, 자신만의 ‘집’을 짓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먼저는 그 집이 ‘가족의 안식처’요 더 나아가는 ‘자기 권세의 과시’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집을 건축할 때는 당연 견고함과 품격이 요구됐다. 그런 이유로 집을 지을 때 ‘대충’과 ‘적당히’라는 ‘눈가림’은 처음부터 용납될 수 없었다. 공(功)을 들이지 않은 건축은 곧 ‘부실(不實)’로 판명된다. 이후 부실(不實)은 붕괴(崩壞)로 이어져 많은 희생이 발생한다.
삶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떤 일에든지 공(功)을 들이는 삶의 태도를 소홀히 하면 그 삶은 부실과 붕괴를 맞이하게 된다. 그래서 현자들은 세상을 지금보다 더 아름답게 변모시킬 삶의 태도로 ‘진기(盡己)’, 곧 ‘무슨 일을 하든지 자신을 다 드려 자신이 사라질 만큼 살아라’를 가르쳤다.
이 대지가 추운 겨울에도 봄빛 희망을 발견하려면, 무엇보다도 사람의 감각을 현혹하는 이의 재주에 환호하기보다는 작고 사소한 일에도 마음을 담아 공(功)을 들이며 살아가는 우직한 장인(匠人)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이다.
또한 불러줄 마땅한 호칭 없이도 이 대지의 ‘열린 봄’을 위해 공(功)을 담아 살아가는 ‘우이공산(愚移公山)의 삶’을 사는 이들이 정중히 존중을 받을 때이다.

프란츠 카프가의 소설 <변신>에는 아버지의 빚과 어머니와 여동생의 허영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삶이 탈진되도록 일하는 청년 그레고르가 나온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이 삶에 지쳐버린 그레고르는 자신을 ‘벌레’라고 생각하며 자학한다. 그러던 어느 날, 침대에서 잠을 깨어보니 자신이 진짜 ‘벌레’가 되어 있음을 알고 절규한다.
침대에 누워 있는 벌레를 발견한 아버지는 사과를 던져 상처를 입히고, 다른 가족도 이 벌레를 흉측하다고 멸시한다. 벌레가 된 그레고르는 어느 새벽 교회 종소리를 들으며 결국 눈물을 흘리며 숨을 거둔다.
이 소설을 읽을 때마다 문득 ‘이 벌레 아니 그레고르를 정말 아프게 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본다. 그렇다. 그것은 분명 아버지가 던진 사과로 인한 상처보다, 자신이 평생 공(功)들여 가족을 부양하고도 오히려 그 가족에게 벌레로 버림당한 그 아픔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대충’과 ‘적당히’라는 이 병든 신종언어가 삶을 급속도로 오염시키고 있다. 그 결과 마음과 수고를 담은 ‘최선(最善)’과 ‘정성(精誠)’이라는 고귀한 하늘어휘가 이 대지에서 축출되어 그 종적을 감춘 지 이미 오래이다. 참 아프다.
가슴 깊은 곳에 ‘하찮은 물 한 그릇도 마음을 담으면 보약(補藥)이 되는 법’이란 말을 기억하라.
세상의 기적은 ‘거센 힘’이 아니라 ‘땀이 묻은 공(功)’이 창조하기 때문이다.

김겸섭
성경해석 연구 공동체인 아나톨레와 문학읽기 모임인 레노바레를 만들어 ‘성서와 문학 읽기’ 사역을 하고 있으며, 현재 서울 방화동 한마음교회를 섬기고 있다. 저서로 <천사는 오후 3시에 커피를 마신다> <사랑이 위독하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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