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깊은 울림이어서일까요, 좋은 스승의 가르침은 오래 갑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하다고, 입장의 동일함이야말로 관계의 최고 형태라고 했던 가르침은 스승이라 여겼던 이가 떠난 뒤에도 오롯이 마음의 등불을 밝힙니다. 입장의 동일함이 관계의 최고 형태라는 말만큼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 곁에 오신 주님의 의미를 더 잘 설명하는 말도 드물겠다 싶습니다.

함께 웃고 울려면
입장의 동일함에 대한 성경말씀 중에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15)는 말씀이 있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은 당연해 보이기도 하고 쉬워 보이기도 하지만, 실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기 위해서는 즐거워하는 이를 부러워하거나 배 아파하는 마음이 없어야 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기 위해서는 고통당하는 자와 나와의 거리가 모두 사라져 그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되어야 합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일이 많은 사회가 밝은 사회겠지만, 아쉽게도 오늘 우리 주변에는 우는 자들과 함께 울 일이 더 많지 싶습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운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신앙의 순서? 신앙의 본질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모습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모습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한센병 환자를 고치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누구도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이 없었던 사람, 누구에게도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던 사람, 병에 걸린 뒤 한 번도 성한 사람의 손이나 몸을 만져본 적이 없었을 사람, 한센병 환자가 찾아와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주님은 손을 내밀어 그를 만져주십니다. “깨끗해져라!” 말씀하시기 전, 먼저 그를 만져주셨습니다.
저는 그것을 ‘신앙의 순서’라기보다는 ‘신앙의 본질’로 새깁니다. 말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말보다도 실천이 앞서는 것이 참된 신앙이겠지요. 오늘 우리의 손이 주님처럼 능력의 손이 아니라 해도 버림받은 누군가의 손을 마주잡을 때, 우리의 손을 통해서도 주님이 이룬 기적은 나타날 것이라고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모습을 생각할 때 또 하나 떠오르는 모습은 엘리사입니다. 엘리사에게 따뜻한 호의를 베푼 수넴 여인은 생각지도 못한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뒤늦게 아들을 낳게 된 것이지요.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엘리사의 축복을 농담으로 여겼던 것은 여인의 남편이 늙어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삶에는 기쁨만 있는 게 아님을 일러주는 것일까요,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 품에서 죽고 맙니다. 여인은 급히 엘리사에게 사람을 보내지요. 이야기를 들은 엘리사가 찾아옵니다. 엘리사는 아이가 죽어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습니다. 방에는 엘리사와 죽은 아이, 둘 뿐이었습니다. 엘리사는 아픔과 슬픔을 정면으로 마주합니다.
엘리사는 놀라운 모습을 보입니다. 주님께 기도를 드린 뒤 죽은 아이 위에 자신의 몸을 포개 엎드립니다. 자기 입을 죽은 아이의 입 위에 두고, 자기 눈을 그 아이 눈 위에 두고, 자기 손을 그 아이의 손 위에 놓고, 죽은 아이 위에 엎드린 것입니다. 온몸으로 빈틈없이 아이의 차가워진 몸을,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아픔을 끌어안은 것이지요. 그렇게 하자 아이의 몸이 따뜻해지기 시작합니다. 잠시 후 다시 한 번 아이 위에 자신의 몸을 포개었고, 그러자 죽었던 아이는 일곱 번 재채기를 한 뒤에 눈을 뜨고 살아납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운다는 것은 우는 이들의 아픔과 슬픔을 말없이 얼싸안는 것입니다. 고스란히 나의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늘의 치유와 회복은 우리 곁에 은총으로 임하는 것이고요.

한희철
강원도의 작은 마을 단강에서 15년간 목회를 했다. 1988년 크리스챤 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동화작가로 등단했고, 단강 이야기를 매주 주보에 담아냈다. 이후 독일 프랑크푸르트감리교회에서 6년여 동안 이민 목회를 하다가 현재는 부천의 성지감리교회를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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