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 눈이 망가진 가네쉬
가네쉬는 한쪽 눈이 완전히 망가졌습니다. 왜, 언제 그랬는지도 모르게 어느 순간부터 그 눈은 기능을 잃었습니다. 그냥 놔두면 썩어 더 큰 어려움이 생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의 가정은 수술은커녕 병원에 한 번 갈 경제적 여력도 없습니다. 부모님은 ‘비하르’라는 지역에서 먹고 살기 위해 떠밀려온 사람들입니다. 비하르는 인도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 중의 한곳입니다.

아이 돕기 위한 모금
그러던 어느 날, 한 무리의 외국인들이 마을을 방문했습니다. 캐나다의 한인교회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무런 연고도 없고 만날 사람들이 없는데도 무작정 이 마을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마을 어귀 공터에서 노래도 하고 태권도도 보여주고 풍선도 불어주면서 마을 사람들과 친해지려고 했습니다. 기독교인이 한 명도 없는 곳이기에 그런 활동으로 누군가와 접촉점을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마을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소리를 듣고 가네쉬의 엄마도 그를 데리고 나갔습니다. 한쪽 눈이 완전히 상한 그의 모습은 당장 눈에 띄었습니다. 외국인 손님들은 가네쉬를 위해 기도하고 눈상태를 살펴보며 안타까워했습니다. 누가 봐도 치료가 급한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이 팀들은 집으로 돌아가서 이 아이를 위해 모금운동을 했습니다. 이 마을에 예수 믿는 사람도, 교회도 없지만 어쩌면 그 아이를 돕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선교의 첫 걸음인지 모른다며 주머니를 털어 치료할 재정을 모았습니다. 소식을 들은 현지인 사역자는 바로 인근도시의 병원에 예약을 했습니다. 아무런 소망이 없던 아이의 치료의 길이 그렇게 한순간에 열렸습니다.

힌두교도 주민들의 반대
그런데 엉뚱한 곳에서 문제가 터졌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아이의 수술을 도와주기로 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주민들이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를 병원으로 데리고 가면 기독교인들이 납치하고 장기를 파내어 장사를 할 것이라는 괴소문도 퍼트렸습니다. 만약 기독교인의 도움을 받으면 마을에서 쫓아낼 것이라고 협박도 했습니다. 타종교에 적대적인 정통 힌두교도들이 장악한 마을이니 어쩌면 당연한 현상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소동을 비하르 출신 가난한 부모는 그대로 당해야만 했습니다. 현지인 사역자도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잘못 대응하면 집단폭행을 당할 수도 있고 장기적으로 핍박의 빌미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는 수없이 상황이나 파악하려고 이 마을을 직접 찾아갔습니다. 가네쉬의 어머니는 그때도 누군가와 긴 통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전화기 밖으로 들리는 험한 목소리, 그리고 기가 죽은 그녀의 목소리만 봐도 대상이 누구인지 짐작이 갔습니다. 그가 이 가정을 협박하는 주범인 게 분명했습니다. 새파랗게 질린 어머니는 대꾸 한 번 제대로 못했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지혜를 주셨습니다.
전화기를 낚아채 야단부터 쳤습니다. 당신이 뭔데 한 가정의 자유와 선택권을 박탈하느냐,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행복을 추구할 권한이 있는데 왜 다른 사람의 인권을 침해하느냐, 이런 행동은 국제법으로도 금지한 것이다, 법적근거 없이 사람을 협박하고 억압하는 것은 이 나라의 헌법도 금지한 것이다.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최대한 엄중하고 공식적인 어투로 그를 나무랐습니다.
당연히 내가 누구인지 궁금했겠지요. 미국에서 온 지역개발 지원단체 책임자라 했습니다. 그는 외국인이 매우 사무적이고 국제법까지 거론하며 항의하자 적잖이 당황하는 듯 했습니다. 그리고 장황한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내가 그동안의 그의 행동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고 용서해주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물론 가네쉬의 눈 수술은 이제 더 이상 방해하지 않을 것이고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그렇게 문제가 풀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전쟁을 승리하게 하실 때 적들이 허상을 보고 서로 싸우게 한 것처럼 악랄하게 이 가정을 괴롭히던 주동자의 손발을 그렇게 묶으셨습니다.

저의 이름은 ‘삼손’입니다
좋아하는 가네쉬 부모를 위로하고 나오는데 아버지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습니다. 소매를 끌기에 그를 따라 골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조용히 속삭였습니다. 사실 자기 이름은 힌두이름인 ‘쉬야마’가 아니라 기독교인 이름인 ‘삼손’이라고. 당연히 어릴 때부터 예수를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힌두마을에 들어와 살면서 혹시 기독교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해코지를 당할까봐 이름을 바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제야 얽혔던 퍼즐이 풀리는 기분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많은 주민들 중에 하필 이 가정을 만나게 하셨을까, 수술이 필요하고 물질적인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다른 마을에도 무수히 많은데 왜 이 아이를 그렇게 돕도록 마음이 모아졌을까, 한 고비가 넘어가는데 왜 이토록 힘이 들었던 걸까….
그 모든 이유는 힌두마을 가운데 숨겨둔 복음의 씨앗을 싹틔우기 위한 주님의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무명의 선교사
지구촌 땅 끝을 다니며 미전도종족에 복음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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